[취중토크] 신승훈 ”내가 아직 솔로인 이유”

    [취중토크] 신승훈 ”내가 아직 솔로인 이유”

    [일간스포츠] 입력 2006.10.18 13:25 수정 2006.10.1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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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이 차오르도록 에너지를 쏟아낸 후 마시는 술 한잔. 맹렬하게 달려본 사람에겐 그 한 잔 술의 희열이 남다르다.
     
    16년을 한결 같이 사랑을 노래한 가수 신승훈(39)과 술잔을 기울였다.
     
    14~15일 양일간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10집 발매 기념 콘서트를 마친 후 공연 스태프가 모두 함께한 '쫑파티'자리에 기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조용한 둘 만의 대화는 애초에 포기. 땀흘린 스태프의 왁자지껄 '쫑파티'현장에 술 잔 하나 더 올릴 심사였다.


     
    이날의 술자리에 모인 인원은 한·중·일(중국과 일본의 매니지먼트 대표)3개 국적으로 구성된 90여 명, 취중토크 사상 최다의 손님이 자리했다.
     
    음반 준비와 공연 준비로 최근 5개월 동안 술과 담쌓고 지냈다는 신승훈은 오랜만에 마음 놓고 술잔을 돌렸다.


     
    ●공연 스태프가 모두 신승훈 팬
     
    서울 잠실의 한 숯불구이집에 공연 스태프 90여명이 모여 앉았다. 공연이 끝난 후 일본·중국 등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를 끝낸 신승훈이 뒤늦게 장소에 앉았다.
     
    스태프 모두가 "승훈이형 수고하셨습니다"라며 박수와 함성이 쏟아진다.
     
    이젠 벌써 데뷔 16년차. 연예계에서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신승훈의 콘서트에는 류시원·황신혜·이재훈·린·윤정수·서지영 등이 다녀갔고 임하룡은 쫑파티 장소에까지 함께했다.
     
    모두 매실주를 잔에 가득 채우자 신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에게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수고했습니다" 건배를 제의했다.
     
    임하룡과 신승훈의 인연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하룡이 고현정과 함께 <쇼 토요특급>을 진행할 당시 소개된 신인 가수가 바로 신승훈과 윤상이었다.
     
    "승훈이는 목소리가 색달라서 한눈에 들어오는 신인이었지. 그런데 너무 완벽주의자고 자존심이 강해서 가끔은 걱정이 되요. 너무 완벽하다 보면 자신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 스스로 상처를 받으니까. 매일 혼자서 음악 연습만 하며 답답하게 살아서 이젠 좀 마음을 풀고 편안하게 살아보라고 권유하는데 쉽지 않나봐요."(임하룡) 임하룡은 "승훈이 노래는 좋은데 노래방서 따라 부르기가 힘들다"며 볼멘 소리다.
     
    신승훈과 기자가 드디어(?) 조용히 술잔을 채우고 대화를 시작한다. 수천 관객의 함성 속에 공연을 마친 소감은 어떨까.
     
    "아직 무대 위의 감동을 내 오감이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 같죠. 공연을 마친 후 불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 앉아 있으면 함성소리가 밤새 귓가에 울립니다."
     
    연주자로 참여한 후배가 술잔을 들고 곁으로 왔다. 오늘 기자는 취중토크를 공짜로 하는 셈. 연신 조명·음향·연주자들이 술잔을 들고 나타나 기자 대신 신승훈에게 술을 권한다.
     
    "형 무대에 서게 돼 정말 영광이에요. 제가 정말 초등학교 때부터 형 팬이잖아요. 공연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 공연에 참여한 스태프 가운데 많은 수가 신승훈의 음악을 들으며 사춘기·청춘을 함께한 팬들이다. 연주자로 참여한 후배들은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이어지는 리허설 동안 단 한차례도 쉼없이 공연연습에 집중하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저래서 국민가수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라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쏟아낸다.
     
    신승훈의 평소 술친구는 작곡가 김형석·김민종·강타 등. 20대에는 소주 등 독한 술을 많이 마셨지만 나이 들면서 주종도 변해 요즘엔 매실주·청주 등을 즐긴다.
     
    싱어 송라이터인 신승훈에겐 술은 창작의 영감을 주기도 했다. 빅히트를 기록한 <나보다 조금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등이 수록된 5집은 술의 힘을 많이 빌린 작품.
     
    "좀 더 어렸을 땐 술마시면 예전 여자친구 생각도 나고 명치 끝이 저려 오면서 감성적으로 풍부했는데 요즘엔 너무 연애를 안해서 그런지…. 감이 안오네요." 그가 꼽는 신승훈 가수 인생 최고의 공연 무대는 바로 2000년 열린 '백 투 더 퓨처'공연이다.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에서 열린 공연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공연을 포기해야 하나 걱정을 하다 무대에 섰는대 1만 명이 입인 하얀 우비가 보였어요. 비가 거세지고 무대 위에서 내가 비를 쫄딱 맞고 있으니 팬들이 한 명씩 우비를 벗기 시작하더군요. 하얀색에서 갑자기 온통 객석이 검정색으로 변했죠. 그때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엔 멋모르고 음악을 시작했고 몇년은 정신없이 음악에 빠져서 음악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10년이 지나니 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 손에 2300원 평생 잊지 못해.
     
    신승훈이 술잔을 들고 식당 여기저기를 돌기 시작했다. 기자는 열심히 옆자리에 앉은 공연 스태프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준 기타가 오늘날 '발라드의 황제'신승훈의 시작이다. 화려한 성공의 뒤엔 남모르는 눈물이 있기 마련.
     
    신승훈의 부친은 음악을 하겠다는 장남의 기타를 세 차례나 부쉈다. 충남대 경영학과 입학 후 신승훈은 음악 동아리에 들어갔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대전 음악감상실·생맥주집·미용실에서 노래하며 장안의 명물이 됐다.
     
    "아르바이트 대학생일 뿐 이었는데 팬레터를 7000통이나 받았을 정도였죠. 당시 대전 MBC <별밤> 로고 등도 내가 만들었고 지방 방송사 공개 방송에서 초대 가수로 노래도 불렀어요. 이문세 형 공연 코러스로도 무대에 올랐구요. 조덕배 형이 대전서 <꿈에> 공연할 때 게스트가 저고, 건반이 김건모였어요. 둘다 그저 가수 지망생일 때죠."
     
    다정다감하고 주변 잘 챙기는 성격의 신승훈은 공연 스태프가 앉은 수십개 테이블을 돌며 소주을 받아 마셨다.
    기자에게 연신 "미안해요. 한 번만 더 다녀올게요"라는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대전의 명물이 돼 가면서 '나도 다른 사람 노래 말고 내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유재하의 유작 앨범을 들었다.
     
    "그 순간 내 인생에 음악이 가슴에 들어와 박혔어요. 그때 작사·작곡을 하자고 마음 먹었죠."
     
    곡을 써 녹음을 해 여기저기 만들어 보냈고 가수 시켜주겠다는 지인의 말에 20만원을 들고 무턱대고 상경한 신승훈은 곧바로 낙원 상가에서 15만원 짜리 기타를 구입한다.
     
    "가리봉동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6개월하고 고작 한달치 월급 12만원 밖에 못 벌었어요. 가수가 되려면 여의도 근처에 살아야 할 것 같아 방송국 앞 월세방에 살았는데 돈이 없어 세끼를 라면으로 때우다 결국 장염에 걸렸죠. 열이 펄펄 끓는데 병원에 갈수도 없고 수중에 딱 2300원이 있었어요. 그 2300원을 평생 기억하리라 마음 먹었죠."
     
    대전까지 가는 통일호 입석 열차 비용이 당시 2300원. 대전역에는 도착했는데 집으로 갈 차비가 없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 엄마의 눈물을 잊을 수 없어요. 초라한 내 모습을 보시더니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그때 이를 악물고 다시 쓴 곡이 <미소속에 비친 그대> 였어요. 촌스럽다는 이유로 퇴짜도 여러번 맞았어요."


     
    60~70년대 생이라면 당시 대단했던 신승훈의 데뷔 시절을 기억할런지 모르겠다. 방송에 얼굴도 내밀지 않은 신인 남자 가수의 노래가 음악 판매 1위에 올랐고 방송 출연 한달도 되지 않아 순위프로그램 1위를 석권했다.
     
    "인기가 많아도 당시엔 별로 변한게 없었어요. 작곡가 형집에 얹혀 살면서 매니저도 없이 의상도 내가 직접 다 들고 다녔어요. 팬들이 달려들때도 내 옷챙기기 바빴죠. 제일 힘들었던 건 얼굴은 알려졌는데 매니저도 차도 없고 또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창살없는 감옥 처럼 늘 갇혀 살았죠.

    그때 비디오 플레이어를 사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겨울나그네>를 봤어요. 그 영화를 보면서 '성악가의 목소리가 이렇게 슬플수가 있구나'를 생각하며 베토벤의 가 앞부분에 삽입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만들었어요."

    ●10집, 마지막 앨범 되는줄 알았다
     
    그 이후 신승훈은 <보이지 않는 사랑> <널 사랑하니까> <그 후로 오랫동안> 등을 연달아 히트 시켰고 '국민가수''발라드의 황제'로 16년을 살아왔다.
     
    그 꼬리표 덕분에 1400만장의 앨범 판매를 기록했지만 반대로 발라드 가수로 그의 음악 지평은 한정지어졌다.
     
    데뷔 당시 '변진섭도 아니고 이승철도 아닌 청명하고 신선한 목소리'로 평가 받은 그의 목소리가 16년이 지나자 '이젠 지겹다'며 그를 가장 괴롭히는 적이 됐다. '예전 노래랑 비슷하다' '형 목소리가 들어가면 모든 노래가 신승훈표 발라드가 된다'는 주변의 조언은 그를 힘들게 했다.

    가수로서 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너무 크게 부각돼 오히려 작곡가로 그의 성과는 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신승훈은 가요순위 차트지인 '뮤직박스'에서 선정한 1위 히트곡이 가장 많은 작곡가다.
     
    "내 목소리가 음악 인생 최대의 적이 될 줄 몰랐어요. 정말 10집을 낼 수는 있을까, 포기해야 하나 괴로웠습니다. 나는 욕해도 좋은데 내가 만들었다는 이유로 내가 만든 곡까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기에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음악을 해야한다는 실험정신과 기존 팬들을 안고 가야 하는 균형 감각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프로듀서로 그를 짓눌렀다.
     
    "5집까지 연속으로 200만장 판매를 기록하면서 스스로 그냥 이젠 인기에는 연연하지 말자고 생각했죠. 어떻게 더 치고 올라가서 인기를 얻느냐 보다 좋게 내려오는 걸 계속 준비했어요. 저야 이젠 트렌드가 아니라 하락세일 수 밖에 없죠.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할 때예요."
     
    10집을 위해 석 달간 집에 틀여 박혀 곡을 쓰고 외로움과 싸웠다. 10집의 대표곡은 '발라드의 황제'란 타이틀을 무색케 하는 웅장한 아이리시풍의 [Dream of my life].
    "내 스타일인 발라드를 대표곡으로 하면 어느 정도의 인기를 담보할 수 있죠. 초반 판매량이나 음반 홍보에도 발라드가 제격이에요. 하지만 10집이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 발라드곡을 뒤로 미뤘어요. 변화와 고민을 보여주고 싶었죠.

    또 이젠 사회인이 된 나의 팬들을 위한 노래예요. 직장·가정에서 중후 역할을 하며 삶에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쫑파티 장소에 술기운이 진하게 퍼졌다. 듣는 본인도 지겹겠지만 묻기도 지겨운 결혼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정말 장담한대로 이번 앨범이 결혼 전의 마지막 앨범일까?
     
    "결혼해서 완전한 인간이 되고 싶어요. 아이를 낳고 살면서 보통 사람들의 단계를 밟아봐야 겠죠. 평균 2년에 한번쯤 앨범을 내니 11집을 발표할 때 기혼자가 돼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젠 정말 노력해 보려구요. 이상형은 수십번 반복 했으니 이젠 넘어가죠. (웃음)"
     
    그의 바람은 자신의 아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보이지 않는 사랑>을 부르고, 팬들은 이 광경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 보는 것이다. 평생 무대에서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겠다는 의미다.
     
    "5개월 동안 술도 못마시고 가슴 속에 돌덩어리를 안고 살았다. 음반을 못내는 줄 알았다"던 '쫑파티'자리의 신승훈은 두려움을 다 떨친 듯 성취감에 젖어 어느때 보다 편안하게 술을 들이켠다.

    모두가 함께 "신승훈 파이팅!"을 외치며 마지막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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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란 기자 [ran@jesnews.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es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