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도쿄스토리] ”내가 좀 이상한가?” 이정후 스스로도 신기한 선천적 강심장

    [IS 도쿄스토리] ”내가 좀 이상한가?” 이정후 스스로도 신기한 선천적 강심장

    [일간스포츠] 입력 2019.11.1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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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생각해도 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야구는 확실히 '멘탈 게임'이다. 국가대표 외야수 이정후(21·키움)가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타석에 설 때마다 '참 잘 친다'는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이정후지만, 남다른 타격 재능과 야구 센스보다 주변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타고난 강심장이다.  
     
    스스로도 '내가 뭔가 좀 잘못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그는 지난 11일 2019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슈퍼라운드가 시작된 도쿄돔에서 취재진과 만나 "긴장감이 뭔지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큰 경기 때도 긴장은 잘 되지 않는다"며 배시시 웃었다.  
     
    실제로 그렇다. 2017년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 1군에 곧바로 합류했음에도 주눅들지 않고 쟁쟁한 키움 타선에서 주전 한 자리를 꿰찼다. 그해 23세 이하 선수들이 출전하는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국가대표로 뽑혀 처음 도쿄돔에 왔을 때도 대만전의 유일한 득점이 된 결승타를 포함해 큼직한 타구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활약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데뷔 첫 포스트시즌에서 펄펄 난 데 이어 올해 역시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까지 전 경기에 나서면서 팀 공격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정후는 "내가 아무래도 상황 인식을 잘 못하는 편인가보다"라고 농담하면서 "중요한 경기라는 게 인식은 되는데, 그럴 때 찾아오는 부담이나 떨림은 잘 없다"고 했다. 심지어 데뷔 첫 한국시리즈를 앞두고도 평정심이 유지되자 "나 자신도 좀 신기했다"고 털어 놓았다. "긴장을 당연히 해야 하는 상황인데 긴장이 안 되니까 '왜 긴장이 안 되지?' 하고 의문이 들더라"며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잘 떨지 않으니까 나는 좋다"고 한 번 더 웃었다.  

     
    지난 11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19 WBSC 프리미어12 슈퍼라운드 1차전 미국과 한국의 경기. 1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한국 이정후가 안타를 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지난 11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19 WBSC 프리미어12 슈퍼라운드 1차전 미국과 한국의 경기. 1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한국 이정후가 안타를 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정후는 야구를 막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그 누구보다 야구를 잘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스타플레이어였던 아버지 이종범 LG 코치는 늘 프로야구 선수로 경기에 출전하느라 1년의 절반은 집을 비웠다. 대신 집에서 TV로 지켜보는 아들에게 야구로 확실한 롤모델이 됐다. 살아 있는 시청각 교육이었다. 집에서는 채찍질 대신 따뜻한 조언을 했다. 장남에게 특별한 야구 유전자를 물려줬을 뿐 아니라 오랜 프로생활을 통해 축적된 무형의 노하우까지 고스란히 대물림했다.  
     
    2020 도쿄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큰 대회를 앞두고도 편안한 표정이던 이정후는 "아무리 큰 경기도 그냥 평소와 똑같은 경기라고 생각하고 임하는 것 같다"며 "오히려 정규시즌 때가 더 긴장되는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또 '주니치 선수 출신' 이종범의 아들로 일본 언론이 주목하고 있다는 말에는 "한국도 아닌 일본 언론 기사에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고, 대회 공식 가이드북에 에이스 양현종(KIA)과 나란히 한국 대표 선수로 소개됐다는 말에는 "그렇게 자꾸 부각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일만 하겠다"고 의연하게 답했다.  
     
    이보다 더 믿음직스러울 수 없는 대표팀의 미래다. 이제 고작 20대 초반인 이정후는 일본의 야구 영웅 스즈키 이치로를 연상케할 만큼 빠른 속도로 공격, 수비, 주루 삼박자를 모두 갖춘 '국제용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1998년 아버지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할 당시 얻었던 '한국의 이치로'라는 별명까지 이미 물려 받았다. 머지 않아 한국 야구의 대들보로 우뚝 설 기세다. 
     
    '가위바위보를 해도 이겨야 한다'는 한일전을 앞두고도 비장한 기색은 없다. 이정후가 아마 입단 후 여러 차례 받았을 질문.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 한일전 당시 아버지가 0-0으로 맞선 8회 1사 2·3루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결승 적시 2루타를 터트린 기억에 대한 것이다. 당시 이 코치는 3루까지 내달리다 아웃됐지만, 그 한 방으로 한국은 4강 진출을 확정했다.  
     
    이정후는 "이번 대회에서 그런 기회가 내게 온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며 "다만 나는 3루로는 뛰지 않겠다. 그냥 정석대로 하겠다"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지금까지 한일전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어서 이번엔 무조건 이겨야 할 것 같다"며 "초등학교 대표팀 때 일본을 한 번 이겨본 뒤 청소년 대표 때와 APBC에서 세 경기 모두 졌다. 1승 3패의 아쉬움을 꼭 만회하고 싶다"고 눈동자를 빛냈다. 
     
    도쿄=배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