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손자’ 이정후 도루왕 향해 뛴다

    ‘바람의 손자’ 이정후 도루왕 향해 뛴다

    [일간스포츠] 입력 2020.03.0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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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후가 대만 가오슝 스프링 캠프에서 슬라이딩 훈련을 하고 있다. 그는 올해 ’도루를 많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키움 히어로즈]

    이정후가 대만 가오슝 스프링 캠프에서 슬라이딩 훈련을 하고 있다. 그는 올해 ’도루를 많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키움 히어로즈]

    ‘바람의 손자’ 이정후(22·키움 히어로즈)가 아버지인 ‘바람의 아들’ 이종범(50)처럼 도루왕이 될 수 있을까. 이정후가 올해는 “적극적으로 도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정후는 지난달 1일부터 대만 가오슝의 키움 스프링캠프에 참가하고 있다. 캠프에서 이정후는 타격 훈련 못지않게 슬라이딩 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는 일단 출루하면 적극적으로 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이정후는 2017년 프로에 입문한 이후 세 시즌(2017~19시즌) 393경기에서 36도루를 기록했다. 그의 한 시즌 최다 도루는 지난해 기록한 13개다. 도루 실패는 통산 15개다. 이정후는 세 시즌 연속으로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차세대 ‘타격 기계’로 떠올랐다. 하지만 도루 앞에서는 유독 작아졌다. 이정후는 “프로에 온 뒤 누상에서 소극적이었다. 특히나 부상을 몇 번 겪다 보니 슬라이딩 때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부상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은데, 훈련을 통해 노하우를 익혀 트라우마를 극복해보겠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2017년 손가락 골절, 2018년 어깨 부상으로 고생했다.
     
    이정후의 아버지 이종범은 ‘전설의 대도(大盜)’다. 이종범은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1993년 무려 73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그해 한국시리즈(KS)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맞아 7개의 도루로 상대 수비를 흔들며 시리즈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1994년에는 역대 한 시즌 최다도루인 84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개인 통산 510도루로, KBO리그 통산 2위다. 이종범은 1루에 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 2루를 거쳐 3루까지 내달렸다. 그래서 얻은 별명도 ‘바람의 아들’이다.
     
    이종범의 빠른 발과 도루를 기억하는 야구팬은 이정후도 그 정도는 할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이정후는 빠른 발이 아니다. 장정석 전 키움 감독이 “아버지(이종범)가 (이)정후에게 발까지 주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정후는 2017년 인터뷰에서 “최근 기록을 재보지 않았다. 고1 때는 100m를 12~13초에 뛰었다”고 말했다. 뛰는 운동을 하는 선수치고는 그리 빠른 편이 아니다. 발 빠르다고 소문난 선수는 10~11초대에 뛴다. 이종범도 선수 시절 100m를 11.5초에 주파했다. 이정후는 종종 “아버지의 빠른 발이 정말 부럽다”고 말하곤 했다.
     
     
    이종범 vs 이정후 연차별 도루 기록

    이종범 vs 이정후 연차별 도루 기록

    이종범은 그 누구보다 아들의 도루 실력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2012년 5월 선수 생활을 마감하면서 “가장 애착하는 기록인 한 시즌 최다도루(84개) 기록을 정후가 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도 이종범은 ‘아들이 언젠가는 해낼 것’으로 믿는 것 같다. 아주 잘못된 믿음은 아니다. 도루가 발이 엄청나게 빨라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종범은 도루를 잘하는 조건으로 ‘머리’와 ‘체력’을 꼽는다. 이종범은 “나는 2루를 훔친 직후에 바로 3루로 뛰었는데, 이는 상대 투수의 허를 찌른 것이다. 보통 도루하고 나면 곧바로 도루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두뇌 게임을 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도루를 많이 하는 선수에게는 견제구가 많이 들어오고, 슬라이딩으로 귀루하는 경우가 잦다. 나는 견제구를 8번 연속으로 겪은 적도 있다. 많이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체력이 좋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정후는 머리에서는 인정받았다. 전문가들은 이정후에 대해 “야구 지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어떤 구종도 컨택해낸다. 프로에 와서 외야 수비를 시작했는데, 불과 1년 만에 일취월장했다. 작전 수행능력도 뛰어나 테이블 세터로 기용된다. 상대 투수의 투구 타이밍만 잘 잡아내도 도루 성공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
     
    프로에 온 뒤 이정후가 고민했던 부분은 체력이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체중을 늘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정후는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다. 신인 시절 키는 1m85㎝로 큰 편이었지만, 몸무게가 72㎏였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하루 네 끼를 먹었다. 조금씩 살이 붙었고, 근육을 만들어나갔다. 현재 몸무게는 85㎏이다. 이처럼 이정후는 도루를 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다. 2017년 이정후는 “몸을 잘 만들어서 1~2년 후에는 도루를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손가락, 어깨 부상으로 당초 목표보다 1년 늦었지만, 이제 뛸 일만 남았다. 대를 잇는 도루왕의 탄생을 향해 ‘바람의 손자’가 뛴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