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야구노트] 추신수와 햄버거, 그리고 마이너리거

    [김식의 야구노트] 추신수와 햄버거, 그리고 마이너리거

    [일간스포츠] 입력 2020.04.0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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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수(38·텍사스 레인저스)는 햄버거를 보면 얼굴이 굳는다.
     
     
    텍사스 산하 마이너리거들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해 추신수는 2억3000만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AP=연합뉴스]

    텍사스 산하 마이너리거들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해 추신수는 2억3000만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AP=연합뉴스]

    "이건 굶어 죽기 전에야 먹는 음식인데…."
     
    농담 같지만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렇지 않다. 햄버거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20대 시절 너무 많이 먹어서, 그 시절 가난이 떠올라서다. 10대의 추신수에게 햄버거는 맛있는 별식이었지만, 30대의 추신수에게는 굶어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다. '눈물 젖은 빵'이다.
     
    추신수의 고생담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2001년 미국으로 떠나 2008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기까지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마이너리거들은 연 5000∼1만 달러(600만~1200만원)를 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두 배인 미국(6만 달러·7300만원)에서 받는 급여라고 믿기 힘들다. 야구 선수는 최저 시급 적용 대상이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메이저리그 시범경기(마이너리그 선수들도 뛴다)가 중단되자마자, 음식 배달을 시작한 선수들의 사연이 소개됐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급여를 받지 못하게 된 마이너리거들에게 앞으로 두 달 동안 매주 400달러(50만원)의 특별수당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텍사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의 선수들은 여기에 '추가 수당'을 받는다. 추신수가 마이너리거 191명 전원에게 1000달러(120만원)씩을 지원한다고 2일 외신들이 보도했다. 1000달러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든 시민권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돈과 같다. 추신수 개인이 마이너리거들에게 주는 돈은 총 19만1000달러(2억3000만원)에 이른다.
     
    추신수는 외신 인터뷰에서 "나도 7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뛴 경험이 있다. (주급으로 생활이 어려워) 원정경기 식대를 아껴 아들 기저귀를 샀다"며 "마이너리그 상황이 당시보다 나아졌다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재능 있는 선수들이 돈 때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기부 이유를 설명했다.
     
    덤덤하게 말했지만 월 1000달러 정도를 겨우 벌었던 그의 마이너리그 시절은 더 눈물겨웠다. 20대 초반 하원미 씨와 결혼한 그는 또래 마이너리그 부부들과 함께 숙식했다. 부부가 침실 하나를 쓰고, 주방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빵에 잼만 발라 먹는 게 식사의 전부였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빛나는 청춘을 그렇게 보낸다. 추신수처럼 메이저리그에 올라가 성공하는 경우는 극소수다.
     
    추신수의 지난해 연봉은 2100만 달러(260억원)에 이른다. 열아홉 나이에 그는 혈혈단신, 무일푼으로 미국에 가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마이너리그 시절의 고생은 더 강해지고, 독해지게 만든 자양분이라고 추신수는 믿고 있다.
     
    지난달 13일 시범경기가 중단된 직후, 추신수는 엘리 화이트(26)라는 선수가 동료들에게 한 말을 전해 들었다. 화이트는 "얼마 전 결혼했다. 야구에 집중하고 싶은데 수입이 없어지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화이트는 논-로스터 초청 선수로 텍사스 마이너리그 명단에 없는 신분이다. 추신수는 화이트도 지원 대상에 넣었고, 자신에게 나오는 메이저리그 식비를 그에게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메이저리그에서는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애덤 웨인라이트, 프레디 프리먼 등이 여러 형태로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산하 마이너리거 모두에게 현금 지원을 하는 경우는 추신수가 유일하다. 추신수는 지난달 코로나19 피해가 특히 컸던 대구·경북 지역을 위해 써달라며 2억원을 기부한 바 있다.
     
    마이너리그 시절, 추신수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다. 아내와 어린 아들(무빈)의 생계조차 책임지지 못한 가장의 죄책감이 추신수의 꿈을 꺾기 직전이었다. 그때 하원미 씨는 "처자식이 걱정 된다면 내가 무빈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당신은 미국에서 끝까지 도전하라"고 했다.
     
    추신수는 "내가 20년 전 미국에 왔을 때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야구 덕분에 많은 것을 가졌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갚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마이너리거들을 보며 20대의 자신을 투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꿈을 꺾지 말라는 뜻으로 지원금을 준 것이다.
     
     
    추신수와 아내 하원미씨와 세 자녀들. [중앙포토]

    추신수와 아내 하원미씨와 세 자녀들. [중앙포토]

    추신수의 기부 소식을 미국 외신뿐 아니라 일본 미디어들도 크게 다뤘다. 메이저리그에 '야구 재벌'은 많지만 실제로 남을 위해 돈을 쓰는 선수는 드물다. 10여 년 전, 남편이 꿈을 잃지 않도록 내조했던 하원미 씨도 함께 고민해 지원책을 마련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여러 영웅이 탄생하고 있다. 의료진의 노력과 희생, 시민들의 연대와 배려가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추신수는 '선배'로서, 또 '동업자'로서 마이너리거들의 꿈을 응원했다. 그는 햄버거를 잊지 않았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