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커제·신진서도 넘는다, 여자 최강 최정의 꿈

    [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커제·신진서도 넘는다, 여자 최강 최정의 꿈

    [일간스포츠] 입력 2020.06.0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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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바둑에서 여자가 남자를 제치고 일인자가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바둑 사상 남자를 뛰어넘었던 여자기사는 딱 한 사람,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이 있다. 루이는 2000년 벽두 국수전 타이틀매치에서 조훈현 9단을 꺾고 우승했다. 본선에선 이창호 9단을 격파하고 도전권을 잡았다.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이창호-조훈현 사제를 연파하고 국수가 되었으니 참으로 놀랍다. 하지만 루이는 이후 수없이 치러진 세계대회서 단 한 번도 왕관을 차지하지 못했다. 일인자에 근접했지만 일인자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아쉬운 점은 10년의 공백이다. 1963년생인 루이 9단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 남편 장주주 9단과 함께 중국을 떠나 10년을 일본과 미국으로 떠돌았다. 그는 간신히 한국에 둥지를 틀었지만 그때는 이미 바둑의 전성기를 훌쩍 지난 36세 때였다. 그에게 10년의 공백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바둑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짙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루이 이후 최강의 여자기사로 24세의 최정 9단이 떠오르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 탓에 시합이 거의 없으므로 지난해 기록을 참조하면 최정은 2019세계여자대회서 15승 1패를 하며 각종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국내 여자기사와의 대결에선 37전 37승. 적수가 없다. 남자에겐 23승 16패인데 그 전적표에 눈에 번쩍 띄는 이름들이 있다. 구쯔하오(중국 4위), 스웨(중국 9위), 강동윤(한국 7위). 이들은 모두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강자들인데 그들이 최정의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놀라운 활약에도 불구하고 최정의 한국랭킹은 19위. 1,2위 안에 들기 위해선 넘어야 할 장벽이 히말라야보다 더 장대해 보인다.
     
    공부에선 여자가 남자를 앞선다고 한다. 바둑도 힘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여자가 남자에게 밀릴 이유는 없어 보인다. 실상은 다르다. 여자기사는 남자기사에게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루이 9단이나 최정 9단 같은 존재는 참으로 특별하다.
     
    루이와 최정의 공통점은 전투적인 바둑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루이는 끊을 수 있는 곳은 무조건 끊고 보는데 이런 루이의 바둑을 보며 남편 장주주 9단조차 “너무 싸운다. 이젠 그만 싸워도 이기는데 또 싸운다”며 허허 웃곤 했다. 최정은 그 정도는 아니다. 루이가 ‘전투 과잉’이라면 최정은 ‘전투가 장기’인 바둑이다. 초반에 느리지만 판 위에 돌이 많아질수록 강해지는 이창호 스타일과도 일맥이 통한다.
     
    최근 AI의 바둑을 보면 전투가 다반사다. 전투는 바둑의 본질이고 강자는 다 전투에 강하다. 그 점에서 루이와 최정의 승부 방식은 최상이라 볼 수 있다. 하나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여자가 일인자가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바둑이 전쟁을 모방했기에 DNA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12세 때 프로가 되어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하호정 4단(바둑의 품격 대표)은 “여자가 남자보다 강해지는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며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어릴 때는 분명 비슷했는데 사춘기를 지나며 차이가 났다. 어느 순간 싸워야 할 적들이 갑자기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최정 9단은 ‘여자도 일인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능하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다. 세계대회서 우승하여 내가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루이 9단은 바둑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 점에 랭킹을 매긴다면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1위다. 최정은 가끔 방황도 했다. 하지만 아직 24세로 이제 전성기에 접어들었고 루이처럼 10년 공백도 없다. 커제, 신진서, 박정환, 양딩신, 미위팅…. 저 앞을 가로막는 기라성같은 이름들을 보면 아득하기 그지없지만 최정은 그들을 넘어보려 한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