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엔드게임] 김광현과 '행운의 자격'

    [김식의 엔드게임] 김광현과 '행운의 자격'

    [일간스포츠] 입력 2020.09.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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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현(32·세인트루이스)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행운을 계량할 수는 없다. 아마 작지는 않을 것이다.
     
    김광현이 2일(한국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그레이트아메리칸볼파크에서 열린 메이저리그(MLB) 신시내티전에서 선발 5이닝 동안 3안타와 볼넷 2개만 내주고 무실점, 시즌 2승에 성공했다. 1회 초 그가 등판하기 전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6점을 먼저 뽑았다. 5회 초에는 11-0으로 앞섰다. 올 시즌 팀 타율 22위 팀을 상대한 것도, 초반부터 대량 득점 지원을 받는 것도 선발 투수에게 어마어마한 행운이다.
     
    김광현은 17이닝 비자책을 기록 중이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0.83까지 내려갔다. 선발 등판한 4경기 평균자책점은 0.44이다. 야구 통계업체 스태츠바이스태츠는 "1913년 이후 김광현의 선발 첫 4경기 평균자책점(0.44)은 1981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0.25) 이후 가장 낮은 왼손 선발 투수의 기록"이라고 전했다.
     
    김광현에게 행운이 따랐다는 주장의 근거로 헛스윙 비율이 사용되고 있다. 지난 4경기 기준으로 김광현을 상대한 타자의 헛스윙 비율은 18.6%에 그쳤다. 이는 MLB 평균(24.4%)보다 한참 낮은 하위 8% 수준. 이 기간 김광현의 삼진율은 10.8%로 MLB 하위 2%였다. 그의 패스트볼 평균 스피드는 시속 145㎞였다.
     
    이런 데이터를 보면 김광현의 호투에는 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던질 때 외야수들이 여러 차례 호수비를 보였다. 그러나 운이 지금의 김광현을 만든 건 아니다. 그는 효과적인 피칭을 하고 있다. 5회 말 마지막 타자인 커트 카살리와의 승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김광현은 우타자 카살리의 바깥쪽 낮은 코스로 패스트볼(142㎞)로 초구를 던졌다. 애써 힘주지 않은 공이 핀포인트로 들어갔다. 카살리의 배트는 공에 닿지 않았다. 2구 커브(112㎞)는 바깥쪽으로 달아났다. 이번에도 헛스윙. 몸쪽을 파고드는 커브(113㎞)에 카살리는 몸을 피했다. 볼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에서 김광현은 몸쪽 낮은 곳을 파고드는 슬라이더(134㎞)를 던졌다. 카살리는 또 헛스윙. 속도차와 좌우 코너워크를 충분히 이용한 피칭이었다.
     
    송재우 MBC플러스 해설위원은 "김광현은 힘으로 타자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KBO리그 베테랑답게 구종의 다양화와 구속의 차이를 활용하고 있다"며 "특히 슬라이더 속도 차를 이용하는 피칭이 눈에 띈다. 야구를 하지 못하는 동안 연구를 많이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KBO리그 시절 김광현은 직구와 슬라이더를 앞세웠다. 구종이 단조롭다는 약점을 극복하고자 커브와 체인지업을 장착하긴 했지만, 위력적이지 않았다. 올해 MLB 시범경기만 해도 김광현은 힘으로 정면승부를 했다.
     
     
    김광현은 MLB 개막전인 7월 25일 피츠버그전에서 마무리 투수로 나서, 힘겨운 세이브(1이닝 2실점)를 올렸다. 힘으로 틀어막으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잔뜩 긴장했고, 구속이 떨어졌다. 송재우 위원은 "그땐 직구와 슬라이더가 다 맞아나갔다. 이후 김광현의 투구 패턴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김광현이 두 번째 등판을 하기까지 3주가 걸렸다. 몰리나를 비롯한 세인트루이스 선수들 10여 명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김광현 등 다른 선수들은 격리 생활을 했다.
     
    이 기간 김광현은 선발 투수로 보직이 바뀌었다. 그는 우리가 예상했던, 세인트루이스 동료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투수로 돌아왔다. 아주 짧은 인터벌로 공격적으로 던지되, 구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김광현은 슬라이더를 던질 때 최저 122㎞~최고 140㎞ 속도 차를 만들어내고 있다. 커브처럼 느린 슬라이더, 직구처럼 빠른 슬라이더로 타자의 노림수를 흔들었다. 탈삼진과 헛스윙 유도율은 낮아도 안타(피안타율 0.182)와 실점을 덜 하는 이유다.
     
    그래도 김광현은 행운과 함께하고 있다. 성적을 보면 그걸 부정할 수 없다.
     
    AP=연합뉴스 제공

    AP=연합뉴스 제공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행운이 찾아올 때 문을 열어주고 환영하는 이의 손을 잡는다.
     
    지난달 초 팀 내에서 코로나19가 퍼질 때 존 모젤리악 단장은 누구보다 김광현을 걱정했다. 모젤리악 단장은 "KK(김광현)가 너무 안타깝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미국이 코로나19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야구를 못하고 있다"며 "그의 고국인 한국은 방역을 잘하고 있다. 김광현은 6개월 넘도록 가족을 보지 못했는데,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김광현은 5년 전 MLB 진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소속팀 SK와 자유계약선수(FA) 계약을 하고 안정적인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난겨울 FA가 아닌 신분으로 MLB에 재도전했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길을 파부침주(破釜沈舟,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배를 가라앉힌다)의 심정으로 떠났다.
     
    김광현은 MLB 시범경기에서 호투를 거듭했다. 그러나 3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스프링캠프 장소였던 플로리다 주피터에서 고립됐다. 연고지인 세인트루이스로 이동한 뒤에도 격리생활이 이어졌다. 식사를 챙겨 먹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구단은 그를 딱하게 여겨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MLB 선수들의 연봉은 축소된 경기 수에 비례해 삭감됐다.
     
     
    그러나 김광현은 버텼다. 꿈을 찾아온 곳에서 자립했다. 갑자기 마무리로 나가라고 했을 때도, 한 경기만 던지고 선발로 복귀하게 됐을 때도 그는 '스마일 K'라는 별명의 주인공답게 웃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모젤리악 단장, 마이크 실트 감독, 그리고 동료 선수들은 김광현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를 칭찬하는 말들, 그에게 벌어지는 행운이 공짜로 온 것 같지 않다. 김광현은 '행운의 자격'을 갖고 있다.
     
    그가 0점대 평균자책점을 오래 유지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는 분명 행운이 작용했을 것이다. 머지않아 김광현은 패전 투수가 될 수 있고,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래도 김광현은 또 버티고, 이겨내려 할 것이다. 
     
    그때도, 행운을 빈다.
     
    김식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