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엔드게임] 염경엽과 제갈량의 '출사표'

    [김식의 엔드게임] 염경엽과 제갈량의 '출사표'

    [일간스포츠] 입력 2020.09.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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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 일어나 늦게 잡니다. 곤장 20대 이상의 형은 모두 친히 검열하고, 먹는 밥의 양은 몇 되를 넘지 않습니다."
     
    『삼국지』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중국 위나라의 군략가 사마의가 촉한의 사자(使者)에게서 들은 대답입니다.
     
    촉한의 승상(丞相) 제갈량의 북벌(北伐)을 막으려는 사마의는 숙적의 건강을 살폈다고 합니다. 제갈량이 식소사번(食少事煩, 적게 먹고 일을 많이 함) 한다는 정보를 얻은 사마의는 전쟁을 지구전으로 끌고 가 이겼습니다.
     
    제갈량도 자신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북벌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제갈량은 사마의가 아니라 자신에게 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은 이유가 있습니다. KBO리그의 제갈량으로 불린 염경엽 SK 감독님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팬들은 감독님을 '염갈량'으로 불렀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지략과 충심의 상징하는 제갈량은 감독님과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지』에 묘사된 제갈량은 여러 면에서 감독님과 닮았습니다. 심지어 소식하고(심지어 금식하고), 숙면하지 못하는 생활 습관도 비슷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점도 같습니다. 제갈량은 세심하고, 과민했을 것 같습니다. 감독님처럼 말입니다.
     
    감독님은 6일 두산전 더그아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팀을 지휘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진해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튿날 SK는 올 시즌 남은 경기를 박경완 감독대행 체제로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야구인이 탄식했습니다. 감독님의 건강이 여전히 나빠 보인다고 걱정했습니다. 감독님은 6월 25일 두산전을 지휘하다 더그아웃에서 쓰러졌습니다. 의식을 겨우 회복해 병원에 후송됐지만, 심신이 매우 쇠약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두 달은 쉬어야 한다고 했다죠.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 2019년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한 SK가 올 시즌 하위권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감독님은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적도 나빴지만, 경기 내용도 좋지 못했으니까요. 경기 중에 의식을 잃은 건 위험신호였습니다. 그런데도 감독님은 정말로 두 달만 쉬고 돌아왔습니다.
     
    감독님은 "두 달 동안 자리를 비워 팬들께 죄송합니다. 희망을 드리는 경기를 하겠습니다"고 하셨습니다. 감독님의 복귀 소감을 듣고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항상 자책하고,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는 모습이 여전해 보여서 였습니다.
     
    두 달이 지나도 SK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감독님 복귀 후 5연패를 당했습니다. 8월 말 기록까지 더하면 8연패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복귀 후 5경기 중 1승만 했어도 감독님이 받는 스트레스가 덜했을 거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연패에 빠진 리더는 지옥에 있는 것 같다는 걸 저도 여러 번 목격했으니까요. 특히 감독님은 더 그랬을 겁니다.
     
     
    '선수 염경엽'은 무명이었습니다. 코치, 스카우트 담당자, 운영팀장 염경엽은 달랐습니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준비했고, 도전했습니다. 덕분에 감독으로서, 또 단장으로서 훌륭한 성과를 냈습니다. '염갈량'이라는 별명을 얻었어도 감독님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성적이 좋을 때도 고민하고 번뇌하느라 하루하루 여위어 갔습니다.
     
    2020년 감독님이 느낀 시련을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1일 복귀했을 때도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습니다. 연패 후 연패. SK의 전력 저하는 곧 감독님의 기력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쓰러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탈진 상태로 보였습니다.
     
    지난주 감독님이 복귀하셨을 때, 저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년에 와도 될 텐데, 지나치게 서두른 것 같아 걱정됐습니다. 부상 선수에게 회복 시간을 충분히 줬으면서, 자신에게는 왜 그토록 인색한가 싶었습니다.
     
    야구는 매일 승패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연패가 꼭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성공 가도만 걸어온 분에게는 패배도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만 경험한 리더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는 걸 감독님도 잘 아실 겁니다.
     
    감독님이 푹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남은 몇 달이 부족하다면, 내년에도 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감독님이 쌓은 '야구 자산'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KBO리그에서 소중하게 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피로에 더 강해져서 돌아오길 바랍니다.

     
    감독님이 왜 서둘러 복귀하셨는지 충분히 짐작합니다.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또 『삼국지』가 떠오릅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후주(後主) 유선에게 그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북벌에 나섭니다. 그의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제갈량의 표문에는 충심(忠心)이 가득합니다. 제갈량을 움직인 건 자신을 삼고초려 했던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었습니다.
     
     
    감독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넥센 감독을 사임한 염경엽을 단장으로 영입하고, 이듬해 감독으로 선임한 구단이 SK입니다. 6월 감독님이 쓰러졌을 때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SK의 삼고초려였습니다.
     
    상소문 같기도, 유언장 같기도 한 제갈량의 출사표에는 꼼꼼하고 치밀한 그의 성정이 녹아있습니다. 단단한 원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를 유선에게 당부하면서 자신을 대신할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을 중용하라 했다고 합니다. 
     
    이제 감독님의 출정지는 어디여야 할까요. 당분간은 야구장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에게 돌아가 기력을 회복하고, 재충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감독님은 아마 미래를 위한 공부를 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독님의 건투를 빕니다. 지금은 건강을 먼저 기원합니다.
     
    김식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