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굴스키 간판 서정화, 다음 도전은 ‘선수 인권’

    모굴스키 간판 서정화, 다음 도전은 ‘선수 인권’

    [일간스포츠] 입력 2020.09.1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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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 인권 전문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에 진학했다는 서정화. 최정동 기자

    스포츠 인권 전문 변호사가 되기 위해 로스쿨에 진학했다는 서정화. 최정동 기자

    서정화(30·은퇴)는 대한민국 모굴 스키의 간판 스타였다. 2년 전 2018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결선에 올랐다. 14위로 입상권은 아니었어도 한국 모굴 스키 역사에 의미있는 이정표를 세웠다. 친동생 서명준(28·은퇴), 사촌동생 서지원(26·은퇴)도 함께 태극마크를 달았던 ‘스키 가족’이다.
     
    서정화는 현역 시절 ‘공부하는 운동선수’로도 유명했다. 서울외고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동아시아학을 전공했다. 그 바쁜 시간과 노력을 쪼개 공부와 운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고교 1학년이던 16살에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고, 2010년 밴쿠버부터, 2014년 소치와 평창까지, 세 번이나 올림픽 본선 슬로프를 질주했다.
     
     
    후배들을 위해 직접 설치한 워터 점프대 앞에서 서정화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후배들을 위해 직접 설치한 워터 점프대 앞에서 서정화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서정화는 원하는 모든 걸 맘껏 누린 ‘국가대표 엄친딸’일까. 9일 강원도 춘천 집에서 만난 그의 설명은 그런 시선이 편견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그는 “국가대표에 처음 뽑힌 뒤 소집훈련 일정이 잡혔다. 그런데 중간고사와 날짜가 겹쳐 이틀 정도 늦게 합류하겠다고 요청했다. 단칼에 거절당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대표 포기 각서를 썼다. 한동안 체육고로 전학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공부를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 오랫동안 ‘스키 곧 그만둘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고 털어놓았다.
     
    서정화는 선수 시절 내내 시간과 싸웠다. 그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면서 올림픽에서 메달권에 입상한 첫 한국 선수’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비록 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지만, 두 길을 걸으며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 자연스럽게 ‘은퇴 후 운동선수 인권 향상에 힘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소개했다.
     
     
    2018 평창올림픽 당시 서정화의 경기 모습. [연합뉴스]

    2018 평창올림픽 당시 서정화의 경기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체육계 구조개혁을 위해 민관 합동으로 구성한 스포츠혁신위원회에 현역 선수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서정화는 “선수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역할이었다. (제의를 받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위원회 회의 과정에서 들여다 본 대한민국 운동선수 인권 실태는, 자신도 선수였지만 충격적이었다. 적이었다. 서정화는 “폭력이나 성폭력, 집단 따돌림은 스포츠만의 상황이 아니다. 문제는 ‘운동 선수’라는 타이틀만 보고 다른 잣대를 가져다대는 사회 분위기다. 구타 피해를 신고한 선수에게 경찰이 ‘운동하다 보면 몇 대 맞을 수 있지 그걸 신고하냐’고 면박 준 사례를 접하고 한숨이 나왔다”고 전했다.
     
    철인 3종 경기 고 최숙현 선수의 죽음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서정화는 “선수가 지속적으로 폭행과 따돌림 당한 상황 자체도 충격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 사건을 다룬 방식이 더 심각하다. 선수가 여러 기관과 단체에 피해를 호소했지만, 어디에서도 위로와 보호를 받지 못했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 ‘기다려라’, ‘상급 단체에서는 사실무근이라는데 왜 그러냐’ 등의 답변만 돌아왔다. 애시당초 선수를 보호할 수 없는 시스템 안에서 발버둥쳤던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위원회에 참여한 경험은 서정화 인생의 물줄기를 바꿨다. 20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 짓고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진학했다. 스포츠 인권 전문 법률가가 돼 힘든 상황에 처한 선수들에게 직접 손을 내밀기 위해서다. 그는 “운동 외적인 이유로 괴로워하는 선수들은 ‘고립됐다’는 느낌 때문에 더 위축된다. ‘언제든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고 안심만 해도 힘든 상황을 견디고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진로 선택 이유를 설명했다.
     
    서정화는 “근래 들어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은 운동 선수 후배가 여럿 생겼다. 최근엔 선수 선발 과정이나 금전적인 부분에 발생한 비리 관련 제보를 많이 받았다. 스포츠계가 한마음으로 자정 노력을 기울이는 지금도 서슴없이 일탈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화가 난다. 선수를 보호하면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뿌리 깊은 스포츠계 병폐를 해소하기 위한 첫 단추는 무엇일까. 서정화는 ‘시스템’을 꼽았다. “지난달 출범한 스포츠윤리센터가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전문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게 먼저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선수들이 신상 공개 등 이른바 ‘2차 가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피해 상황을 호소할 수 있는 길부터 열어줘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스포츠 기본법’ 발의를 통해 소수 엘리트 위주로 운영되어 온 스포츠의 무게중심을 생활체육으로 옮겨야 한다. 성적지상주의를 떨쳐내지 않는 한 대한민국 스포츠의 개혁은 요원하다”고 강조했다.
     
    춘천=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