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최다 우승팀의 '투타 겸업' 에이스 해태 김성한…”백인천은 제압하기 힘든 상대”

    [창간특집] 최다 우승팀의 '투타 겸업' 에이스 해태 김성한…”백인천은 제압하기 힘든 상대”

    [일간스포츠] 입력 2020.09.24 06:00 수정 2020.09.24 08:28
    글자크기
    글자크기 키우기 글자크기 줄이기
    원년 타점왕이자 10승 투수 김성한 전 KIA 감독은 현재 광주CMB에서 친정팀 타이거즈의 홈 경기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투타 겸업' 원조 김 전 감독은 타석과 마운드에 모두 나선 덕분에 더 집중력 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IS포토

    원년 타점왕이자 10승 투수 김성한 전 KIA 감독은 현재 광주CMB에서 친정팀 타이거즈의 홈 경기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투타 겸업' 원조 김 전 감독은 타석과 마운드에 모두 나선 덕분에 더 집중력 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IS포토

     
    10승과 2점대 평균자책점. 해태 왕조 대표 스타이자 한국 야구 대표 타자인 김성한(62) 전 KIA 감독이 프로야구 원년 남긴 기록이다. 해태는 선수 영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고작 15명으로 프로야구 원년 시즌 치렀다. 김 감독의 천부적인 재능은 이런 팀 사정으로 인해 더 돋보였다. 
     
    1982년 3월 28일 열린 롯데와의 첫 경기부터 투수로 나섰다. 해태 투수 방수원, 신태중이 5회까지 11점을 내주며 마운드가 무너진 상황에서 세 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밀어내기 볼넷과 희생플라이, 야수 실책으로 추가 점수를 내줬지만 피안타 1개 없이 남은 이닝을 막아냈다. 김 감독은 이후 40번 더 마운드에 오르게 된다. 
     
    구단의 선수 운영, 선수의 일정 소화 모두 체계가 잡히지 않던 시절이다. 전투원이 적었던 해태는 유독 그랬다. 대학 시절 이미 망가졌던 김 감독의 오른 팔꿈치는 다시 소모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만 없었다. 오히려 더 의욕적으로 그라운드에 섰다. 
     
    원년 타점왕(69개)도 김 감독의 차지였다. 3할(0.305) 타율도 해냈다. 타자로도 뜨거웠다.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팀 타이거즈의 원년은 초라했다. 그러나 김성한은 빛났다. 원조 '투타' 겸업 선수 김성한 감독과 해태 역대 첫 경기와 1982년을 돌아본다.
     
    타이거즈는 82년 1월 30일 박건배 구단주를 비롯, 김동엽 감독과 코치진 및 14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가졌다. KIA 제공

    타이거즈는 82년 1월 30일 박건배 구단주를 비롯, 김동엽 감독과 코치진 및 14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가졌다. KIA 제공

     
    - 프로야구 출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나.
    "당시 대학(동국대) 졸업반이었지만 이미 실업팀 한일은행에 입단이 예정됐다. 급여도 받았다. 1981년 11월 해태에서 연락이 왔다. 프로 무대에서 뛰어 보고 싶은 마음은 컸다. 그러나 부상을 당하거나 낙오되면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기왕 야구를 했으니 (야구선수로) 승부를 걸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뛰어들게 됐다."  
     
    - 해태는 15명으로 원년 개막전을 맞이했다. 이유가 있었나.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가 있었고, 광주일고도 전국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전반적으로 선수층이 두껍지 않았다. 실제로 개막전에 나선 선수 다수가 군산상고 출신이 많았다. 방수원, 강만식, 차영화, 신태중, 김종모 정도만 다른 고교 출신이었다. 대체로 프로 도전이라는 모험보다는 안정된 삶을 선택한 선수가 많던 것으로 기억한다."  
     
    - 1982년 3월 27일 공식 개막전(삼성-MBC 청룡)은 현장에서 관람했나.
    "출범식이 끝나고 롯데와의 경기를 위해 부산으로 이동했다. 나중에 TV 뉴스를 통해 이종도 선배가 끝내기 홈런을 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발 방수원이 1회를 못 채우자 신태중에 이어 마무리로 김성한이 나와 3이닝 무실점을 거둔다. 3번 타자로 나서서 3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 구덕구장에서의 해태 개막전은 2-14의 치욕적 패배였다. IS포토

    선발 방수원이 1회를 못 채우자 신태중에 이어 마무리로 김성한이 나와 3이닝 무실점을 거둔다. 3번 타자로 나서서 3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 구덕구장에서의 해태 개막전은 2-14의 치욕적 패배였다. IS포토



    - 최다 우승팀 해태의 시작은 초라했다. 3월 28일 롯데전에서 14-2로 졌다.  
    "1회 수비부터 상대 타순이 한 바퀴 돌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중반 이후에도 투수가 폭투도 많고, 제구력이 흔들리니까 포수던 박전섭이 격분하는 모습을 경기 중에 드러내기도 했다. 그날 경기 뒤에 박전섭이 김동엽 감독에게 크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경기인 MBC 청룡전에서는 이겼다."
     
    - 6회 초 1사 3루에서 해태의 1호 득점을 이끄는 희생플라이를 쳤다. 그러나 롯데 선발 노상수에게는 고전했다.  
    "노상수는 언더 핸드이자 롯데의 에이스라고 볼 수 있었다. 당시 잠수함 투수는 경쟁력이 있었다. 그가 등판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공략할지 연구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시절에도 몇 차례 승부를 했지만, 약했던 기억이 난다."
     
    - 선발 3루수로 나섰지만, 6회 말 1사 만루에서 마운드에 섰다.(김 감독은 3이닝 동안 피안타와 실점을 기록하지 않았다.
    "팔꿈치 부상 탓에 대학교 1학년 이후 마운드에 서지 않았다. 그러나 팀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해태는 투수가 3~4명밖에 없었다. 나를 투수로 준비시키더라. 그때는 (투수는) 임시로 나선다고 생각했다. 투수 파트 훈련이 끝나면 야수 훈련에 합류했다. 다른 이들에 핀잔도 받았다. 처음에는 '그냥 훈련 삼아서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이후 성적이 좋았고, 연습경기에서도 활약하면서 개막전에서 3번 타자 겸 3루수로 나설 수 있었다."
     
    현역시절 투구하는 김성한 해설위원의 모습. 중앙포토

    현역시절 투구하는 김성한 해설위원의 모습. 중앙포토

     
    - 투수로도 10승을 올렸다. 원년 다승 7위였다. 평균자책점(2.79)도 좋았다.  
    "롯데와의 개막전에서는 점수 차가 많이 났다. 김동엽 감독도 다른 투수를 아끼기 위해 나를 마운드에 내세운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잘 던졌고, 결과도 좋았다. 이후 감독은 나를 언제든지 마운드에 올릴 수 있는 선수로 여겼다."
     
    - 거부 의사를 전하지는 않았나.
    "당시에는 감독의 지시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만도 갖지 않았다."
     
    - 원년 타점왕(69개)이다. 타자에 전념했다면 더 좋은 성적을 얻지 않았을까.
    "아니다. 힘이 있고 체력이 뒷받침됐던 시절이다. 둘 다 열심히 하다 보니 집중력도 더 높아졌다. 그러나 몸에 한계는 왔다. 팔꿈치가 아파서 원년 후기 리그부터는 투수로 나서진 못했다."    
     
    - 원년 이후에도 등판 기록이 있다.  
    "내세울 투수가 없을 때 종종 나섰다. 1986년까지다. 1983년 6월 8일 삼미전 등판이 기억난다. 경기 당일에 김응용 감독이 '오늘 선발 투수다'고 그러셨다. 이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뒀고, 1위던 삼미와의 승차를 좁혔다. 9일 경기까지 이기며 시리즈 스윕을 거뒀다. 이 시점부터 해태는 치고 올라갔고, 삼미는 처지기 시작했다. 해태가 전기 리그를 1위로 마쳤다."
     
    - 투타 겸업 에피소드가 있다면.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투수 연봉과 타자 연봉을 따로 받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은 있다. 부인하니까 연봉 협상 때 얘기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원년 시즌 끝나고 협상 테이블에서 말을 꺼내봤다.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82년 창단 후 첫 해외 전지훈련 중 시내에서 러닝하고 있는 해태 선수들. 중앙포토

    1982년 창단 후 첫 해외 전지훈련 중 시내에서 러닝하고 있는 해태 선수들. 중앙포토

     
    - 숙박은 어땠나. 여관을 사용한 팀도 있었다더라.
    "해태는 아니었다. 김동엽 초대 감독이 '프로는 품위를 갖춰야 한다'고 매우 강조했다. 당시에는 단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고급스럽게 해야 야구도 고급스럽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등 번호(11번)를 선택한 이유는.
    "인원수가 없다 보니 등 번호를 두고 경쟁한 일은 없었다. 대부분 실업 또는 학창 시절 쓰던 번호를 썼다. 김봉연 선배가 27번, 김일권 선배는 1번, 김종모는 10번을 달았던 기억이 난다. 등 번호보다는 유니폼 제작 자체에 품격이 생겼다. 아마 시절에는 체육사에서 만든 유니폼을 그저 허리 사이즈만 맞춰서 입었다. 그러나 프로에는 단복부터 가봉하더라."  
     
    - 투타 겸업을 했다. 상대 타자 또는 투수 가운데 가장 까다로웠던 상대는.
    "투수로 나설 때가 더 기억 남는 상대가 많다. MBC 청룡에 백인천 선수 겸 감독은 꼭 잡아보고 싶었다. 일본 리그에서 워낙 좋은 성적을 남겼으니 내 공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다. 오기도 났다. 그러나 좀처럼 제압하기 힘든 상대였다. OB 김우열, 윤동균 선배도 강타자로 기억한다.
     
    - 김성한의 1982년을 돌아본다면.
    "막연한 심정으로 프로 무대에 진입했다. 그러나 내 자리를 만들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더 세련된 야구를 해내겠다는 각오가 생긴 시간이다. 나는 성공적인 한 해였다고 봤다." 
     
    - 15명이 뛰었던 원년 해태 타이거즈를 돌아본다면.
    "김봉연 선배가 홈런을 잘 쳤고, 김일권 선배가 도루도 잘했다. 김일권 선배는 도루왕이었다. 김준환 선배, 김종모도 좋은 타자였다. 나는 타점왕이었다. 그러나 배터리 구성이 어려울 만큼 투수와 포수가 부족했다. 4위(38승 42패)로 시즌을 마친 이유다."
     
    83년 프로야구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해태타이거즈 선수들이 주장 김봉연 선수에게 샴페인을 부으며 자축하고 있다. 중앙포토

    83년 프로야구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해태타이거즈 선수들이 주장 김봉연 선수에게 샴페인을 부으며 자축하고 있다. 중앙포토

     
    - 1983년은 전기 리그 1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팀 쇄신이 이뤄진 것인가. 
    "팀 전력 평준화를 위해 1983시즌부터 해외 동포 영입이 가능했다. 외국인 선수 영입 개념으로 볼 수 있었다. 삼미는장명부 선배를 영입해 전력이 상승했다. 해태는 포수 김무종과언더 핸드 투수 주동식 선배를 영입했다. 주동식 선배는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2승을 거둔 투수다. 1982년 12월에는 삼성 내야수던 서정환 선배를 영입했다. 역대 1호 트레이드다."  
     
    - 박건배 해태 구단주에 대한 기억은.
    "한국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현장을 존중했다. 대우도 파격적이었다.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넉넉한 지원과 열정적인 응원을 받았다. 그룹 인사가 야구단에 간섭하는 일도 없었다. 1983시즌부터 지휘봉을 잡으신 김응용 감독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 일간스포츠와도 인연이 깊다. 
    "내 기억에는 1988년부터 일간스포츠가 주최하는 시상식이 열린 것 같다. 내가 초대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1989년 올해의 선수상도 받았다. 당시 패넌트레이스 MVP도 영광스러운 상이었지만, 일간스포츠의 올해의 선수상이 더 권위가 있었다. 다른 매체 시상식에서는 상을 받지 못했다. 고마운 언론사다." (김성한 감독은 1988년 리그 MVP를 수상했다)
     
    - 원년 멤버가 보는 현대 야구는.
    "일간스포츠에 내가 전날 짬뽕을 먹고 홈런을 쳤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 날이었다. 부산 원정이었다. 한 야구팬이 돈 2만원을 쥐여 주시더라. '오늘도 짬뽕 먹고 홈런을 쳐달라'며 말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즘 야구 선수들도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팬들을 향한 고마움이 더 커져야 한다. 야구팬이 몇 년 전보다 줄어든 이유는 명확하다. 끊임없이 이상한 짓을 하는 선수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관리해야 한다."
     
    - 가장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
    "과거 이종범처럼 화려하고 거침없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이정후가 조금 더 눈길이 간다. 많은 타격 기록을 다시 쓸 수 있는 선수다. 무엇보다 야구를 정말 사랑하는 선수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