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아픈 손가락' 삼미 개막전 3번타자 김무관…”구단주 바뀔 때마다 가슴 철렁”

    [창간특집] '아픈 손가락' 삼미 개막전 3번타자 김무관…”구단주 바뀔 때마다 가슴 철렁”

    [일간스포츠] 입력 2020.09.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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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처음으로 열린 춘천 프로야구 개막식. 삼미 슈퍼 스타즈 선수들이 피켓을 들고 입장해 서있다. IS포토

    1982년 처음으로 열린 춘천 프로야구 개막식. 삼미 슈퍼 스타즈 선수들이 피켓을 들고 입장해 서있다. IS포토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개막전 3번 타자를 시작으로 한 팀의 역사를 함께한 김무관 전 SK 타격 코치. SK 제공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개막전 3번 타자를 시작으로 한 팀의 역사를 함께한 김무관 전 SK 타격 코치. SK 제공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2월 5일 창단해 1985년 6월 21일까지 존재한 원년 구단이다.
     
    약 3년 4개월, 1233일 동안 짧은 운영 기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간간히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팀명이 소환되고 있다. 역대 최저 승률(1982년 0.188·15승 65패) 역대 최다 18연패(1985년 3월 31일~4월 29일) 특정팀 상대 시즌 최저 승률(1982년, OB전 16전 전패) 등 불명예 기록 탓이다.
     
    삼미는 1985년 4월 30일 MBC를 상대로 최계훈이 4-0 완봉승을 거두며 18연패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다음날(5월 1일) 삼미는 청보에 70억 원에 구단 매각을 발표했다. 전기리그까지 삼미 유니폼을 입고 뛰기로 해 1985년 6월 21일 롯데전을 끝으로 더는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유니폼을 볼 수 없게 됐다.
     
    이처럼 '삼미 슈퍼스타즈'는 KBO리그 역사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슈퍼스타 감사용'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 영화와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다.
     
    삼미의 개막전 3번 타자로 출전한 김무관(65) 전 SK 코치를 통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천숭의초-상인천중-인천고 출신의 김 전 코치는 삼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청보-태평양-현대에서의 코치 생활까지. 김 코치는 팀이 몇 차례 매각되는 동안에도 한 팀에 머무르며 변화의 역사를 함께 했다.
     
    타격 지도에 정평이 나 '무관 매직'으로 통했던 그는 지난해 SK를 끝으로 현재 일선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김 코치는 "오래전 기억을 소환해줘 감사하고 뭉클하다"고 옛 추억에 잠시 젖었다.
     
    훈련 중인 삼미 선수단의 모습. 중앙포토

    훈련 중인 삼미 선수단의 모습. 중앙포토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
    "한일은행에 입단해 뛰다가 육군 경리단에서 제대할 즈음이었다. 당시에는 29~30살이면 대부분 은퇴를 했기에, 나 역시 은퇴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프로 야구 출범이 확정되고, 한일은행에선 '프로 구단에 가지 말고 팀에 복귀해 지도자 생활을 하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적지 않은 나이여서 지도자 생활을 고민하다가 (삼미에서) 돈을 조금 더 준다고 해 계약했다. 입단 후 팀 내에서 거의 최고참이었다."
     
    -창단 멤버가 23명이더라.
    "25~30명 수준으로 구성된 다른 구단에 비해 선수가 적은 편이었다. 야수진은 괜찮았는데, 투수진이 약해 경기 후반에 늘 역전을 당했다. 사실 타격도 도깨비 방망이였다."
     
    -삼미철강 아마추어 야구팀 선수였던 감사용(1승 15패 1세이브)을 영입했는데.
    "물론 선수도 부족했지만 (그룹의) 사기 진작, 또 삼미철강 출신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캐치프레이즈 가운데 '어린이에게 꿈을'이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으니까."
     
    -당시 마스코트가 슈퍼맨, 치어리더가 원더우먼이었다.
    "선수단도 내심 다른 팀은 호랑이(타이거즈) 사자(라이온즈)인데 삼미 슈퍼스타즈만 홀로 사람(영화 속 가상 인물인 슈퍼 히어로)으로 해서, 이미지가 조금 약한 게 아닌가 느꼈다." 
     
    -개막 한 달도 안 돼 초대 故 박현식 감독이 사퇴했다.
    "성적 부진 탓이다. 훗날 들은 바에 따르면 삼미 구단주께서 야구에 굉장히 관심이 컸다고 한다. 미국 유학 시절에 메이저리그 1년 입장권을 사 즐겼을 정도로…그래서 야구단 창단까지 했는데 초반에 팀 성적이 안 좋았으니…박현식 감독은 실업 야구 시절 최고 홈런 타자 출신이다."
     
    -전년도 최하위팀 삼미 슈퍼즈가 1983년에는 돌풍을 일으키며 질주했다. 그런데 시즌 중에 '인천 야구의 대부'로 불렸던 故 김진영 감독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83년 장명부가 입단해 30승을 거둔 시즌이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팀 성적이 좋았다. 6월 1일 잠실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옥신각신했다. 곁에서 보기엔 폭행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경기를 전두환 대통령이 TV 중계로 봤다고 하더라. 김 감독님께서 폭력 혐의로 부산 롯데전 중에 경찰에 연행돼 끌려갔고 구속기소 됐다. 아무래도 팀 분위기에 좋을 리 없었다."
     
    -삼미는 짧은 기간 동안 감독 교체가 많았고, 대형 트레이드도 많이 진행됐다. 팀 분위기는?
    "황당한 일들이 많았다. '프로'라고 불렸지만, 아마추어리즘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일본에서 뛴 장명부가 1983년 입단해 '프로'의 의미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처음에는 순수 프랜차이즈로 구성된 팀에 트레이드를 통해 타 구단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점차 갈등이 생겼다."
     
    현역시절 김무관 전 코치의 모습. IS포토

    현역시절 김무관 전 코치의 모습. IS포토

     
    -불명예 기록 탓에 여전히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이 소환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은 어떤가.
    "운동선수라면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승부욕이 강하지 않나. 그래서 더 부끄럽다. 당시 투수력이 정말 약했다. 나무 배트로 1~2점을 뒤집기 쉽지 않았다. 장명부가 등판 후에 하루 쉬고 또 던지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또 임호균은 롱릴리프로 정말 많이 던져줘 미안했다. 투수력이 한정되다 보니 기록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점수를 많이 내고도 연패를 끊어줄 투수가 거의 없었다. 패배의 굴욕감은 어떤 식으로든 치료가 안 된다. 모두 열심히 했지만 부담감이 커 무너졌고, 이는 계속 반복됐다. 약팀의 전형적인 모습이겠지만 굴욕감이 커 잠도 안 오더라."
     
    -장명부는 1983년 무려 427⅓이닝을 던지며 30승 1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6을 기록했다. 현대 야구에선 볼 수 없는 기록인데.
    "우리가 어렸을 때 부산에서는 TV를 켜면 (일본) 야구가 중계됐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선수가 삼미에 입단했다. 이미 일본에서 전성기를 보낸 뒤 한국에 왔다. 아마추어리즘이 강한 우리에게 프로 선수의 자세를 심어줬다. 당시 팀 내에서 같은 고참급이어서 친했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보는데 상대 투수의 직구와 커브 등 구종을 다 알아맞혔다.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투수의 손이 글러브에 들어갈 때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라'고 일러줬다.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신태중(1955년생, 통산 5승 14패 5세이브)은 공은 좋은데 컨트롤이 나빴다. 장명부가 '가운데 보고 던져라. 왜 도망 다니냐. 타자랑 싸우는 거다'라며 많은 도움을 준 덕분에 점점 좋은 모습을 보인 기억이 난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인천 공설운동장에 마련한 비닐하우스 연습장. IS포토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인천 공설운동장에 마련한 비닐하우스 연습장. IS포토

     
    -당시 숙소나 식사 등 선수단 지원은 열악하지 않았나?
    "조금 열악했다. 당시 홈구장이던 도원 구장(현 숭의야구장)에 식당이 없었다. 그래서 도시락을 베테랑은 더그아웃에서 먹었지만, 젊은 선수들은 마땅한 장소가 없어 야구장 밖 한쪽에 걸터앉아 먹곤 했다. 관중과 겹쳤던 탓에 이런 모습이 노출됐다. 부끄러웠다. 이듬해인가 간이 식당을 만들어줬다. 또 버스에서 옷을 갈아입곤 했다. 요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훗날 들어보니 당시 도원 구장이 인천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을 앞두고 급하게 지어지는 바람에 무허가 시설이어서 구장 개조나 리모델링도 어려웠다고 하더라."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후 청보, 태평양, 현대까지 구단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인수자가 나오지 않으면 선수단이 공중분해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으니까. 현대에 인수됐을 때 비로소 '좋은 회사(주인)가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1985년 6월 21일 롯데전이 삼미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입고 치른 마지막 경기였다.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선수들과 저녁을 먹는데 TV 뉴스를 통해 구단 매각 사실을 알게 됐다. 큰 충격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우리가 못해서 팀을 매각하는 건가?'라고 걱정했다. 감독·코치님이 선수단을 불러 모아 '팀명이 바뀔 뿐, 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동요하지 마라'고 하셨다. 그래도 (안 좋은) 팀 분위기가 오래갔다. 한편으로 청보 핀토스로 바뀌면서 '지원이 좋아질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팀명이 바뀌고, 얼마지 않아 트럭 한 대가 야구장으로 왔다. 라면이랑 청바지가 가득 실려 있었다. 구단에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어라'고 선수단에 선물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보다 지원을 잘해주려나 보다. 야구만 잘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구단주께서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에피소드 중 한 가지는 마운드 교체 시에 바뀐 투수가 좌측 펜스 쪽에서 마차를 타고 나왔다. (청보 핀토스의 마스코트는 조랑말이었다.) 그런데 관중석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 함성에 놀라 그라운드로 나오며 똥을 싼 적도 있었다. 또 투수 교체에 시간도 많이 소요됐다. 그래서 곧 폐지됐다."
     
    -프로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OB 베어스와 경기였고, 상대 투수는 언더핸드 박상열이었다. 우리 팀이 한 점 차로 앞선 경기 후반 1사 만루 찬스, '여기서 하나 치면 승기를 잡을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타석에 들어섰다. 박상열이 던진 공을 쳤는데, 내 발을 맞고 3루수 앞으로 굴러갔다. 즉, 파울이다. 너무 아파 1루로 뛰지도 못했다. 그런데 당시 심판진이 '파울'을 선언하지 않자, OB 3루수가 홈으로 던진 뒤 1루에 공이 전달돼 공수 교대가 이뤄졌다. 내가 스파이크를 벗어 심판에게 보여줬는데 번복이 안 됐다. 다음날 타구에 맞은 부위에 멍이 크게 생겼더라. 중계석에선 '선수가 경기 도중에 왜 신발을 벗냐'고 했는데,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팀은 이겼나?) 결국 그 경기는 졌다."
     
    -또 있나?
    "1982년인가 1983년에 경기에서 졌다. 대구 원정을 떠나야 하는데 우리 팬들이 버스를 둘러싼 뒤 유리창을 하나 남겨놓고 다 깨트렸다. 선수들은 버스 안에서 이를 피하려고 헬멧을 쓰고 있었다. 결국 다음날 대구로 출발했다. 당시 팬 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팀 성적이 안 좋아 수모를 많이 당했다. 또 해태 타이거즈랑 경기할 땐 관중이 엄청나게 몰렸다. 야구장 인근 정비 공장과 식당이 다 문을 닫을 정도였다. 도원 구장 문이 부서져 사람이 다친 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삼미 슈퍼스타즈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한 마디.
    "18연패 기간에 관중이 절반 이상으로 확 줄었다. 정말 팬들께 미안했다. 야구를 하면서 이처럼 마음 쓴 적도 없는 것 같다. 직업 선수였지만 조금은 프로 의식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야구를 잘하지 못했던 우리에게 열렬히 응원을 보내준 삼미 슈퍼스타즈 팬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또 죄송하다. 이제는 삼미 슈퍼스타즈가 추억 속에만 남아 있지만,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다시 한번 삼미 슈퍼스타즈를 추억해주시는 많은 분께 감사하고, 앞으로도 기억해 주셨으면 한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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