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엔드게임] 야구는 정운찬 총재를 비토했다

    [김식의 엔드게임] 야구는 정운찬 총재를 비토했다

    [일간스포츠] 입력 2020.10.15 06:00 수정 2020.10.1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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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12월 3년의 임기를 마치는 정운찬 KBO 총재. IS포토

    오는 12월 3년의 임기를 마치는 정운찬 KBO 총재. IS포토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3일 서울 도곡동 KBO 컨퍼런스룸에서 2020년 제5차 이사회(사장단 회의)를 열었다. 올해 12월로 3년 임기가 끝나는 정운찬 총재는 연임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KBO 이사회는 정지택 전 두산베어스 구단주대행을 차기 KBO 총재로 총회(구단주 회의)에 추천할 것을 의결했다.
     
    이사회는 먼저 첫째 안건인 포스트시즌 운영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30분 후 정운찬 총재가 "난 연임할 의사가 없다. 차기 총재를 추천해 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들은 새 총재 후보를 곧바로 추천했다.
     
    한국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를 관장하는 KBO 총재는 정·재계 거물들에게도 상당히 인기 있는 자리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까진 지낸 정운찬 총재도 오래전부터 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첫 임기만 채운 뒤 물러나게 됐다.
     
    이사회가 예우를 갖추기는 했지만, 정운찬 총재는 사실상 재신임을 받는 데 실패했다. 2018년 1월 공식 취임한 그는 임기 첫해 리더십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다. 정운찬 총재도 이를 인지해 연임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사회가 기다렸다는 듯 새 인물을 추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몇몇 구단주들이 한두 달 전부터 새 총재를 물색했다는 게 야구인들의 전언이다.
     
    키움 히어로즈가 일으킨 스캔들은 정운찬 총재를 내내 괴롭혔다.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히어로즈와 다른 구단들의 '뒷돈 거래'가 밝혀진 것이다. 히어로즈는 2009년 12월부터 2018년 초까지 트레이드 23건을 통해 189억50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KBO 신고액(4건 58억원)보다 131억5000만원 많았다.
     
    히어로즈의 부정한 거래는 정운찬 총재 취임 이전의 일이다. 그러나 이를 처리하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 KBO는 히어로즈 구단에 제재금 5000만 원을 부과했고, 이장석 전 대표를 무기 실격 처분했다. 다른 8개 구단에는 제재금 2000만원을 부과했다.
     
    히어로즈 구단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내리고, 근본적인 개선책 마련을 기대했던 야구인들의 원성이 컸다. KBO는 뚜렷한 해법 없이 손쉽게 벌금만 매기고 넘어갔다. 이게 화근이었다.
     
    이장석 전 대표에 이어 등장한 허민 히어로즈 이사회 의장은 기행을 이어갔다. 경영진을 감시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측근을 대표이사로 내세워 실질적으로 구단을 지배했다. 지난겨울 키움 경영진과 임은주 부사장의 갈등이 법정 싸움으로 번졌다. 지난 6월에는 음주운전 삼진 아웃으로 실형을 받은 강정호의 복귀를 추진하다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지난 8일에는 포스트시즌을 앞둔 손혁 감독을 사실상 경질했다. 키움이 사고를 친 만큼 KBO리그의 가치는 추락했다. 이사회의 불만은 계속 커졌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장면은 2년 전 정운찬 총재가 2018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때였다. 그즈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야구 대표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선수 선발 과정에서 병역미필자를 우대했다는 논란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선동열 대표팀 감독이 국감 증인대에 섰다. 정치권의 무리한 공세를 선동열 감독은 잘 막아냈다. 오히려 수준 낮은 의혹 제기와 질의를 한 정치인들이 역풍을 맞았다.
     
    2주 후 국감에 출석한 정운찬 총재는 정치인 편에 섰다. 그는 "대표팀의 전임 감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추어 선수들을 대표팀에 포함했어도 결과(금메달)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테드 윌리엄스처럼 스타 선수가 감독으로 잘 풀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등의 말을 했다. 선동열 감독의 지도방식은 물론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답변 도중 다른 감독 후보를 언급하기도 했다. 사견이라면서 정치인이 듣고 싶은 말을 다 해줬다. 이게 고스란히 전국에 중계 됐다.
     
    야구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이끄는 KBO리그와 구성원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책무를 정운찬 총재가 공개적으로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최종 승인한 대표팀 명단도 부정했다.
     
    선동열 감독은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놨다. 여론이 선 감독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정운찬 총재의 발언을 듣고 사퇴 했다. 당시 정운찬 총재가 정치계와 어떤 밀약이라도 했는지, 그랬다면 뭘 얻었는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정운찬 총재는 취임 1년도 되지 않아 이미 리더십을 잃었다. 이후 그는 야구계에 큰 이슈가 생겨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올 시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속에서도 KBO리그는 정규시즌을 정상적으로 치러내고 있다. KBO가 마련한 방역수칙이 세계 스포츠의 표준 모델이 됐지만, 이를 정운찬 총재의 공로로 인정하는 야구인은 없다.
     
    정치권에서 내려온 '낙하산'이 아니라면, 역대 총재들은 대부분 연임에 성공했다. 정운찬 총재는 연임에 도전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주창한 '클린 베이스볼'과 '야구의 산업화'라는 화두만 공허하게 남았다. 
     
    김식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