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베이브 루스도 흑백 차별도 넘은 진짜 홈런왕

    [삶과 추억] 베이브 루스도 흑백 차별도 넘은 진짜 홈런왕

    [중앙일보] 입력 2021.01.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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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런이 1975년 터너필드에서 역사적인 통산 715호 홈런을 때려내던 순간. [AP=연합뉴스]

    에런이 1975년 터너필드에서 역사적인 통산 715호 홈런을 때려내던 순간. [AP=연합뉴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전설적인 홈런왕 행크 에런이 별세했다. 에런이 선수 생활 전부를 보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구단은 “그가 애틀랜타 자택에서 8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고 23일 발표했다.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에런은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 선수 중 한 명이다. 1954년 데뷔한 그는 76년 은퇴까지 개인 통산 3298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 5리에 755홈런, 2297타점, 240도루를 기록했다.
     
    MLB 최다 홈런 기록 달성 기자회견에서 활짝 웃는 에런. [AP=연합뉴스]

    MLB 최다 홈런 기록 달성 기자회견에서 활짝 웃는 에런. [AP=연합뉴스]

    그는 74년 베이브 루스(714홈런)를 넘어 메이저리그 개인 통산 최다 홈런 1위로 올라섰다. 2007년 배리 본즈가 홈런 762개를 기록해 통산 최다 홈런 1위 자리를 빼앗았다. 그런데도 팬들이 ‘진정한 홈런왕’으로 기억하는 선수는 에런이다. 본즈의 금지 약물 복용 파동이 곧 알려졌기 때문이다.
     
    에런은 역대 타점에선 개인 통산 1위를 지키고 있다. 또 통산 23시즌을 뛰는 동안 25차례나 올스타에 뽑혔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959∼62년, 한 시즌에 두 차례 올스타전을 개최했다.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그의 활약은 인정됐다. 1982년 97.8%의 높은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MLB닷컴은 “당시까지 에런보다 높은 득표율로 헌액된 선수는 98.2%의 지지를 받은 타이 콥(1936년)뿐이었다”고 전했다.
     
    2016년 마지막 터너필드 경기에 참석해 마지막 공을 던진 에런. [AFP=연합뉴스]

    2016년 마지막 터너필드 경기에 참석해 마지막 공을 던진 에런. [AFP=연합뉴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에런은 메이저리그 데뷔 후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새 역사를 썼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에 “에런은 그저 홈런 수를 늘리기 위해 베이스를 돈 게 아니다. 그는 편견의 벽을 깨는 게 국가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직접 보여줬다. 그는 미국의 영웅이었다”고 썼다. 롭 맨프레드 MLB 커미셔너는 “에런은 모든 부문에서 최상위권에 오른 대단한 선수다. 기록상으로도 대단하지만, 그의 인성과 진실성은 더 대단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개인 통산 302홈런을 때린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은 “에런을 보며 ‘경기장 안팎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오늘 전설을 잃었다”고 추모했다. 일본 프로야구 최다 홈런(868개) 기록 보유자인 오 사다하루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은 “에런은 대단한 신사로서 MLB 선수들의 거울이 되기도 했다”고 추모했다.
     
    1982년 10월 방한해 이건희 삼성 구단주(왼쪽)와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1982년 10월 방한해 이건희 삼성 구단주(왼쪽)와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에런은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흑인 가정의 장남에게 야구는 ‘그림의 떡’이었다. 어릴 때부터 농장에서 목화를 따면서 생계를 도았다. 야구가 하고 싶을 때면 병뚜껑을 야구공, 나무 막대기를 배트 삼아 연습했다.  
     
    에런은 15세에 동네에서 야구 하다 기회를 잡았다. 지역 세미프로 야구팀 구단주 에드 스콧이 우연히 에런의 타격을 보고 자신의 팀 입단을 권유했다. 재능은 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던 천재 소년이 마침내 진짜 야구 세계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다. 그는 흑인만 뛰는 니그로리그에서 마이너리그로, 다시 메이저리그로 옮겼다. 에런이 담장 밖으로 넘기는 타구가 늘어날수록, 흑인 선수들의 앞에 놓였던 장벽도 하나씩 무너졌다.  
     
    방한 당시 ‘백설햄’이 적힌 유니폼을 입은 에런. [연합뉴스]

    방한 당시 ‘백설햄’이 적힌 유니폼을 입은 에런. [연합뉴스]

    쉽지 않은 길이었다. MLB에서 승승장구하던 에런은 통산 713호 홈런을 치고 73년 시즌을 마쳤다. 백인들의 영웅 베이브 루스의 MLB 최다 홈런 기록에 한 개 차로 접근했다. 겨우내 에런을 향해 93만여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협박 편지였다. “흑인 녀석 보아라. 이 검은 짐승아, 만약 네가 홈런을 더 쳐서 위대한 베이스 부스의 기록을 넘어선다면, 널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에런뿐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협박했다. MLB닷컴은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더그아웃에서 에런의 옆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총을 맞을 수 있다는 이유로 동료들이 그의 옆에 앉길 꺼렸다”고 썼다. 실제로 에런은 74년 시즌을 앞두고 “내가 계속 경기에 나가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과 가족, 동료들의 안전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부당한 차별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여느 때와 똑같이, 배트를 들고 당당히 타석에 섰다. 그해 4월 9일 LA 다저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마침내 개인 통산 715번째 홈런을 때려냈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어머니와 포옹한 에런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배영은 기자 bae.younge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