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매니저] OB의 재구성 - 역대 재일교포 투수 올스타

    [프로야구 매니저] OB의 재구성 - 역대 재일교포 투수 올스타

    [일간스포츠] 입력 2010.06.2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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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85년부터 국외교포에게 문호를 개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기는 날을 보기가 어려운 삼미와 선수난에 허덕인 해태 등 전력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1983년부터 조기 실시했다.

    주동식, 김무종을 영입한 해태가 한국시리즈를 제패하고, 장명부, 이영구를 앞세운 삼미가 돌풍을 일으키며 각 구단은 우수한 재일교포 선수를 영입하는데 혈안이 됐다. 1990년대 들어서 재일교포 선수들의 활약이 미비해졌지만,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그들을 편의상 포지션 별로 1명씩을 선정해봤다.

    ●1선발 - 김일융 (삼성, 1984~1986년)
    54승 20패 3세이브 WHIP 1.21 평균자책 2.53 피안타율 .240

    일본 프로야구에서 2년(77~78) 연속으로 평균자책 1위에 오른 요미우리 에이스 출신의 좌완 투수. 사실 시즈오카상고 1학년 때 팀을 코시엔 대회 준우승으로 이끌며 전국구 스타로 주목을 받았다. 코시엔 대회 직후 고교를 중퇴하고 요미우리에 입단하며 논란을 일으켰다(드래프트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의 요미우리 입단을 계기로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외국인도 드래프트를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으로 개정됐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 두자릿수 승리를 거뒀지만, 팔꿈치 부상이 재발하며 은퇴의 갈림길에 섰다.

    1984년 OB와 치열한 영입 전 끝에 삼성 유니폼을 입은 그는 16승을 거두며 김시진과 함께 좌우 쌍두마차를 형성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7차전에서 유두열에게 역전 3점 홈런을 허용하며 패전의 멍에를 썼다. 1985년에는 25승을 올리며 전후기 통합 우승에 공헌. 1986년을 끝으로 일본에 복귀한 그는 타이요(현 요코하마)에서 컴백상을 받는 등 통산 116승 123패 39세이브를 남겼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타자와 정면승부를 펼치는 스타일이었지만, 삼성에서 완급 조절에 눈을 뜬 데 이어 미국 전지훈련을 통해 포크볼을 장착한 것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린 비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삼성 이선희가 1982년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만루홈런을 허용한 것처럼 김일융은 한국 데뷔 첫해(84) 삼미와의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각각 3점 홈런을 두들겨 맞았다.

    ●2선발 - 최일언 (OB-LG-삼성, 1984~1992년)
    78승 57패 11세이브 WHIP 1.33 평균자책 2.87 피안타율 .238

    김일융을 영입하는 데 실패한 OB(현 두산)가 선택한 카드가 센슈대학을 막 졸업한 최일언. 당시 프런트였던 구경백 경인TV OBS 해설위원은 “키운다는 개념은 절대 아니었다. 일본에서 매우 강한 사회인야구팀에 들어갈 예정이었다.”라고 밝혔지만, 다른 팀들이 일본 프로야구 출신을 보강한 것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두산의 전매특허인 ‘육성 재일교포 선수’로 볼 수 있다.

    데뷔 첫해부터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한 그는 1986년 대박을 터트린다. 221⅔이닝을 소화하며 19승 4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1.58. 0.99를 기록한 선동열을 제외하고서도, 1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한 투수가 그를 포함해 무려 5명이 배출된 투고타저의 한해였다고 해도 대단한 성적임은 변함이 없다. 1990년에는 한 지붕 두 가족인 LG 유니폼을 입었는데, 그의 트레이드 상대는 김상호. 최일언이 LG에서 단 3승에 그쳤지만, 김상호는 1995년 서울 홈런왕에 오르며 시즌 MVP를 받았다. 두산에 위대한 유산을 남긴 복덩어리였다.

    ●3선발 - 장명부 (삼미-청보-빙그레, 1983~1986년)
    55승 79패 18세이브 WHIP 1.34 평균자책 3.55 피안타율 .275

    재일교포 신드롬을 몰고 온 장본인. 어느 팀으로부터도 지명을 받지 못하고 자유계약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그는 ‘노무라 재생공장’을 통해 1급 선발 투수로 성장했다. 난카이-히로시마에서 통산 91승을 거두었지만, 어깨·허리 부상과 장래 지도자 생활을 기대하며 1983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82년 최하위를 기록한 삼미가 그에게 준 몸값은 당시로써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1억 3천만 원. 당시 전·후기리그를 합쳐 팀당 100경기를 펼친 가운데 그가 등판한 경기 수는 무려 60경기(선발 44경기)이며 이닝은 427⅓이닝. 30승 16패 6세이브, 평균자책 2,34를 기록했다.

    장명부가 한국 프로야구 유일한 30승(선발 28승)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완급조절과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몸쪽 승부가 주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치를 겸한 1984년에는 20패(13승)를 기록한 데 이어 1985년에는 25패(11승)에 머물렀다. 빙그레로 이적한 1986년에는 15연패를 포함한 1승 18패. 그해를 끝으로 방출당한 그는 삼성, 롯데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했지만, 1991년 5월 각성제 복용 혐의로 구속되며 한국에서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에서 택시 운전사 등을 하던 그는 2005년 4월 13일 자신이 점장으로 있던 마작 가게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4선발 - 김신부 (청보-태평양-LG, 1986~1990년)
    32승 36패 5세이브 WHIP 1.31 평균자책 3.73 피안타율 .271

    1986년 장명부와 결별한 삼미는 김기태와 함께 김신부를 새로운 재일교포 선수로 영입한다. 김신부는 1982년 난카이에 1순위로 지명된 우완 정통파 유망주였지만, 부상으로 언더스로 전환했다. 재일교포 빅3로 불린 김기태와 비교해서 일본 프로야구 1군에서 뛴 적이 없었기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저비용(계약금 2,800만 원) 고효율(10승)을 보이며 맹활약. 1990년에는 같은 언더스로인 이길환과 트레이드되어 LG 유니폼을 입지만, 단 2승에 머물며 방출당했다.

    ●5선발 - 김정행 (롯데, 1985~1988년)
    28승 21패 WHIP 1.35 평균자책 3.19 피안타율 .243

    1985년 롯데 유니폼을 입은 김정행은 사실 1984년에 영입제안을 받았지만, 그때는 가족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주니치와 롯데에서 96경기에 등판해서 1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 6.04를 기록한 전형적인 불펜 투수였지만, 한국에서는 통산 71경기 중에서 66경기를 선발로 등판했다. 140km/h 중반대의 속구를 앞세운 그는 1986년 6월 5일 빙그레를 상대로 5개의 탈삼진에 4개의 사사구만 허용하며 역대 2번째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중간계투 - 주동식 (해태, 1983~1984년)
    13승 12패 3세이브 WHIP 1.22 평균자책 2.94 피안타율 .244

    니혼햄과 한신에서 주로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통산 16승 19패, 평균자책 3.97을 기록한 잠수함 투수. 선수난에 허덕이던 해태에 김무종과 함께 입단해 1983년 V1에 공헌했다. 시즌 7승에 머물렀지만, 전기리그 우승이 걸린 6월 9일 삼미와의 광주 대첩 마지막 경기에서 장명부와 맞대결을 펼쳐 8⅓이닝 산발 7피안타 무실점 호투를 기록하며 3:0 완승을 이끌었다. 이 승리로 해태는 삼미를 반 경기 차이로 제치며 전기리그 수위에 올랐다.

    사실 주동식은 해태 시절에 알려진 것만 해도 3번이나 구단과 선수단과의 불화로 시즌 중에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가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면 어쩌면 해태의 첫 우승은 1986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문희수 동강대 감독은 “구단과의 연봉 문제로 마찰을 빚었지만, 자신의 경험을 아끼지 않고 알려주는 등 마음씨가 착한 이였다.”라고 회고했다.

    ●중간계투 - 김일부 (태평양, 1988년)
    2승 4패 2세이브 WHIP 1.44 평균자책 4.38 피안타율 .264

    1982년 2순위로 주니치에 입단했지만, 1군에서는 뛴 것은 8경기. 홍문종을 대신해서 영입한 태평양은 꽤 기대를 걸었지만, 주로 구원 투수로 나서며 2승에 머물렀다. 최고 140km/h 중후반 대의 빠른 볼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구를 받쳐줄 변화구가 없었던 것이 기대에 못 미친 성적의 원인이었다.

    ●셋업맨 - 김기태 (청보-삼성, 1986~1987년)
    16승 19패 5세이브 WHIP 1.34 평균자책 3.73 피안타율 .251

    김일융, 장명부와 함께 재일교포 빅3로 불릴 정도로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거물급 잠수함 투수. 150km/h를 웃도는 빠른 볼을 앞세워서 1974년 20승을 거두며 퍼시픽리그 다승왕에 올랐지만, 교통사고로 선수 생명에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재기한 그는 2년(79, 80) 연속으로 퍼시픽리그 구원투수상을 받았다. 장명부에 이어 청보 유니폼을 입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9승에 머물렀다. 1987년에는 김근석, 정현발과 트레이드되어 삼성으로 이적.

    사실 김기태라고 하면 올드팬들은 1969년 재일교포 고교 선발팀으로 내한해서 선린상고 유남호와의 맞대결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오른손 검지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김기태는 고교 최강인 선린상고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5회에 1실점을 한 게 전부였는데도 패전투수가 되는 줄 알았다. 김기태가 워낙 잘 던졌거든. ‘1점 주고 패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9회에 상대 에러로 변동원이 홈을 밟으면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사실 김기태와 같은 정통 잠수함 투수가 생경한 것도 있어서 우리 팀이 꼼짝을 못했어. 특히, 땅에 붙어오는 변화구의 각이 매우 컸다. 슬라이더나 커브가. 또 공이 떠오르고 하니까 우리 팀이 안타를 하나도 못 쳤어. 8회 말 2사까지 퍼펙트게임을 당했어. 정장원이 볼넷을 얻을 때까지.” 유남호 KBO 경기운영위원의 설명이다.

    ●클로저 - 김성길 (삼성-쌍방울, 1987~1993년)
    54승 46패 39세이브 WHIP 1.26 평균자책 3.38 피안타율 .261

    한큐에서 9년간(78~86) 1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 4.89을 기록한 잠수함 투수로, 1983년 장명부, 김일융에 이어 재일교포 투수로서 한 획을 그은 이가 김성길이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 연속 두자릿수 승리를 챙겼고, 특히 1991년에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16승 12패 18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1991년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1회 성준을 구원 등판해서 12⅓이닝 동안 9피안타 1실점 하는 호투를 펼쳤다. 그러나 롯데도 박동희가 10⅔이닝을 15탈삼진 5피안타 1실점 하는 괴력을 발휘하며 4시간 37분의 13회 연장전은 3:3 무승부로 끝났다.



    글 : 야구라 손윤 (yagoor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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