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연재 '리듬체조, 겉으론 아름답지만…'

    손연재 '리듬체조, 겉으론 아름답지만…'

    [중앙일보] 입력 2012.09.15 00:17 수정 2012.09.1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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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에 걸고 있던 메달을 놓친 느낌이었어요.”

     곤봉 두 개를 놓쳤을 때 미소가 떠나지 않던 손연재(18·세종고) 선수의 입가에서 “아-” 하는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난 8월 11일 런던 올림픽 리듬체조 개인종합 결선. 후프와 볼 종목 합계 3위를 달리던 손 선수는 곤봉에서 뼈아픈 실수로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리본까지 마친 최종 순위는 5위. 동메달을 딴 리우부 차카시나(벨라루스)와는 불과 0.225점 차이었다.

     “많이 아쉬워요. (올림픽 전엔) 메달은 꿈도 못 꿨지만, 그래도 목에 걸고 있다가 뺏긴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경기를 끝내고 정확히 한 달 만인 11일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손 선수는 마치 어제 일을 떠올리듯 얘기했다. 메달을 따야 세간의 부정적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괴로웠던 기억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10대의 나이로 올림픽이라는 큰 산을 넘었다. 메달은 아쉽게 놓쳤지만 누구보다 주목받았다. 리듬체조 선수로 입지도 확실히 굳혔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카나예바(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얘기를 물어요. 예전엔 제가 리듬체조 선수인지도 모르는 분이 많았는데, 정말 신기해요.”

     볼이 통통했던 네 살, 엄마 손을 잡고 리듬체조와 처음 만난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외길을 걸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아름다운 운동.” 손 선수가 콕 집어 말하는 리듬체조의 매력이다.

    “메달을 목표로 세웠다면 메달 땄을 것”

    런던 올림픽 결선에서 곤봉 연기를 마친 뒤 관중들에게 화답하고 있는 손연재.
    손연재는 불모지인 한국에서 리듬체조를 꿈꿨다. 훈련장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고군분투하던 손연재는 2년 전 리듬체조 선진국 러시아로 건너가 더 큰 꿈을 품었다. 그래도 언감생심, 메달은 남의 것이라 여겼다.

     “처음엔 (올림픽) 목표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시즌 초반엔 결선 진출이었는데, 월드컵시리즈에서 좋은 성적을 내다 보니 욕심이 났어요. 그렇다고 제가 메달을 생각할 순 없었어요. 목표가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도전하고 싶어지잖아요.”

     손연재는 지난해 9월 열린 프랑스 몽펠리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종합 11위로 상위 15명에게 주는 올림픽 티켓을 땄다. 마지막 종목 곤봉 연기를 끝내는 순간 런던행을 직감한 손연재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타인의, 그리고 스스로의 기대치가 높아졌다. 1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손연재는 “사람들이 ‘11위 했으니 다음엔 메달?’ 이렇게 생각한다. 나 역시 11위 밖으로 밀려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올림픽 출전권 따기 전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고 털어놨다. 소수점 차이로 순위가 바뀔 만큼 경쟁이 치열한 상위권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 위해선 상상하기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1년 뒤 손연재가 다시 그때를 얘기했다. “2011 세계대회 끝나고 올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이걸 내가 해서 올림픽에서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부담감이 심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저를) 안 좋게 보는 시선도 많았잖아요.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메달을 바라는구나 생각했어요. 만약 메달을 따지 못한다면 계속 이렇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시즌 초반까지만 해도 정말 메달은 가능성이 안 보였거든요.” 당시를 떠올리는 목소리에 힘겨움이 묻어났다.

     바뀐 작품이 몸에 익지 않은 시즌 초엔 성적이 들쑥날쑥했다. 지난 2월 러시아 모스크바 그랑프리에선 개인종합 18위까지 미끄러지기도 했다.

     세계 챔피언이 아닌데도 큰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이 누군가에겐 불만이었고, 그런 감정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여과 없이 손연재에게 전달됐다. 어린 소녀에겐 상처였지만 이 역시 스스로 극복해야 할 과정임을 깨달았다.

     “그냥 제 앞에 놓인 것만 봤어요. 당장 할 일, 오늘 내일의 목표만 생각했어요. 특히 올림픽 때는 남이 무슨 말을 하든, 뭘 원하든 제가 하려던 것만 생각했어요. 그 기간만이라도.”

     스스로 부담감을 극복했기에 올림픽 5위라는 좋은 성적이 가능했다. 한국 리듬체조 사상 최고의 성적이자 아시아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는 결과였다. 그래도 메달 가까이 갔었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제가 세웠던 목표는 달성했는데, 아무래도 그 목표까지만 된 거 같아요. 목표를 메달로 잡았다면 메달을 따지 않았을까요.” 개인종합 5~7위. 손 선수가 실질적으로 잡았던 목표였다. 그는 목표의 최대치를 이뤘다.

    하루 8시간씩 운동한 ‘독종’

     타고난 유연성과 신체조건. 여기에 오랜 기간 노하우가 축적된 훈련 시스템. 동유럽 선수들이 갖고 있는 것인데, 손연재에겐 없다. 출발선부터가 달랐다.

     손 선수의 무기는 강한 의지와 끈기였다. 그는 1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나라가 불모지라지만 우리 선수들도 하면 잘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한번 마음먹으면 해내는데, 외국 선수들은 ‘그냥 그냥’ 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요. 이런 점에선 한국 선수들이 훨씬 유리하죠. 물론 타고난 체형은 차이가 있어요. 그래도 체형으로 점수를 주진 않거든요. 어느 정도 실력이 되면 (체형의 핸디캡은) 커버할 수 있어요.”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바로 그 자신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손 선수는 후천적 노력으로 동유럽의 아성을 무너뜨린 첫 번째 동양인이었다. 그는 혈혈단신 러시아에서 하루 8시간씩 훈련해온 ‘독종’이었다. 부모님과 친구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스스로 달래고 조절했다.

     그램(g) 단위로 체중을 관리하는 러시아 대표팀 전지훈련지에선 먹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꿈을 위해 자신을 설득해 왔다. 배가 고파 잠을 이루지 못할 땐 룸메이트와 대회가 끝난 뒤 먹을 것들을 서로 얘기하며 고달픔을 달랬다.

     손 선수의 전담 코치인 옐레나 니표도바는 빠른 시간 적응한 그를 두고 “러시아 체질”이라고 불렀다. 홀로 타지에서 지내면서도 의젓한 모습을 잃지 않는 어린 제자에 대한 대견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담긴 표현이었다.

     강한 의지와 성실함은 올림픽에서도 빛났다. 경기 전날 실전과 똑같은 환경에서 치러지는 포디엄 훈련. 손 선수는 실제 경기를 하는 것처럼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점프 등 어려운 동작은 간간이 빼버리고 하는 선수들도 많았지만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저는 신체 조건이나 어느 것 하나 그런 선수들보다 잘난 게 없으니 열심히라도 해야죠. 심판들이 포디엄 훈련을 다 지켜보고 있어요. 모든 경기마다 ‘나는 언제나 열심히 하고, 또 열심히 하려고 한다’는 걸 보여주려 해요.”

     포디엄에서 잘한다고 해서 심판이 본 경기 때 점수를 더 주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평가하는 종목인 만큼 성실한 선수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직 앳된 외모와 목소리를 지녔지만 그 안엔 누구보다 강한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손 선수는 김한솔(14·강원체중), 천송이(15·오륜중) 등 부쩍 자란 후배들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저보다 빨리 세계 무대에 나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때 ‘팀 경기’에도 희망을 갖게 됐어요.” 그의 머릿속엔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4위로 아깝게 팀 경기 메달을 놓친 뒤 펑펑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아직 또렷하다.

    “올림픽 스타 된 것 아직 실감 안 나”

     한국에 돌아온 그는 메달리스트를 뛰어넘는 스타가 돼 있었다. 손 선수는 “나도 메달리스트들을 팬의 입장에서 바라본다”고 했지만 언론과 광고계가 가장 주목한 선수는 손연재였다. 그를 찾는 전화가 쇄도하는 통에 담당 에이전트의 스마트폰에 ‘에러’가 나는 상황이 생길 정도였다. 한 취업사이트에선 ‘런던 올림픽 선수들 중 기업 채용 담당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입사원은 손연재’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그 역시 런던 올림픽을 변화의 기점으로 삼았다. “스타라는 건 실감나지 않는다”면서도 이 말만큼은 확실히 했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제가 리듬체조 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전엔 기사 등을 통해서만 보다 이제 ‘진짜’ 제 모습을 보여줬다는 게 가장 좋아요.”

    리듬체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도 뿌듯했다. “제가 리듬체조 선수인지도 모르고, 리듬체조 자체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젠 처음 보는 분들이 제게 카나예바와 드미트리예바(런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얘기를 해요. 기술에 대한 것도 많이들 알고 계시고요.”

     리듬체조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리듬체조가 스포츠냐? 무용이지’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리듬체조는 확실히 스포츠예요. 권투에는 없는 예술성도 필요하지만 유연성과 밸런스, 체력 등 모든 것이 요구되는 종목이에요.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종목이죠.” 자신의 종목에 대해 고민하고, 이해하려 애쓴 흔적이 그의 답변에서 드러났다.

     리듬체조는 스포츠와 예술의 경계에 선 종목이다. 음악에 대한 이해, 풍부한 감수성은 리듬체조 선수가 갖추어야 할 기본 바탕이다. 손 선수가 김연아 선수와 비교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다. 리듬체조와 피겨 스케이팅 모두 관중에게 ‘응원’보다는 ‘감상’을 요구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오랫동안 권투·레슬링·축구 등 대결 스포츠를 즐겨온 한국인도 점차 퍼포먼스 종목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손 선수에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 챔피언 출신인 김연아 선수와의 비교는 아직은 부담스럽다. “저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언니를 바라봐요. 한국에서 나올 수 없는 훌륭한 선수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1년 전의 답도 비슷했다. 그는 “김연아 언니를 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제가 유명해지리라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어요.”

     손 선수는 내년이면 대학생이 된다. 연세대 수시모집 특기자전형 스포츠레저학과에 지원했다. 한국 리듬체조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지만 아직은 은퇴 뒤 경로를 설정하진 못했다. 러시아어·영어·일본어 등 4개 국어를 할 만큼 학업 욕심이 많은 손 선수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요정’은 ‘숙녀’로 성장하고 있었다.

    손애성 기자